“죽음의 메시지가 조작되었다”…히가시고 게이고의 ‘명탐정의 규칙’
“죽음의 메시지가 조작되었다”…히가시고 게이고의 ‘명탐정의 규칙’
  • 김세영 기자
  • 승인 2011.07.06 1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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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는 계절을 탄다. 봄에는 시집, 가을에는 로맨틱한 연애 소설, 겨울에는 따스한 차 한잔과 함께 읽는 수필이 제격이다. 그럼 여름에는 어떨까.

아무래도 극적 긴장감과 스릴, 공포로 등줄기에 땀 한방울 쭉 흐르게 하는 추리 소설이 아닐까 싶다. 흥미진진한 소설 속 사건에 빠져 탐정과 함께 범인을 쫓다 보면 어느새 창 밖이 희뿌옇게 밝아오기 일쑤다. 그런데 범인 쫓기보다 치기 어린 탐정 비웃기와 트릭 까발리기에 골몰해 독자로 하여금 배꼽을 쥐고 깔깔거리게 만드는 추리 소설이 있다면, 그것도 미스터리의 대가 히가시고 게이고의 작품이라면 어떨까. 도대체 어떤 책인지 궁금하다.

지난 달 KBS 1TV에서 방송된 ‘책 읽는 밤’에서는 패널들 간에 잠시 설전이 벌어졌다. 이날 소개된 소설 ’명탐정의 규칙’을 과연 추리 소설로 볼 것인가에 관해서였다. 심지어 “추리 소설의 형식을 완전히 파괴했다”며 비난을 하는 패널도 있었다. 그런데 이들이 마지막에 공통적으로 하는 말이 “재미있기는 하다”는 것이었다. 추리 소설도 아니라며 재미있기는 하다니, 이쯤 되면 책을 들춰보지 않을 수 없다.

동명의 일본 드라마 시리즈로도 유명한 ’명탐정의 규칙’은 인기 작가 히가시노 게이고 작품 세계의 분기점이 되는 소설이다. 이 책에는 여느 추리 소설과 마찬가지로 범인을 추적하는 한 쌍의 ‘파트너’가 등장한다. 명석하지만 치기어린 탐정 ‘다이고로’와, 닳고 닳은 지방 경찰로 번번이 헛다리만 짚는 ‘오가와라 반조 경감’. 소설은 이들이 풀어가는 12개의 살인 사건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데 소설의 도입부에서 경감이 자신을 소개하는 부분에서 독자들은 이미 수상한 낌새를 채게 된다.

“아니!?...” 이런 얘기는 추리 소설 팬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약속이자 언급해서는 안되는 금기 사항이다. 알면서도 눈감고 넘어가야 하는 일종의 규칙인 것이다. 그걸 폭로하는 데서 작가의 배반은 시작된다. 이후 작가는 추리 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12개 패턴을 차례로 등장시키며 그 진부한 설정과 부자연스러움을 낱낱이 까발리고 신랄하게 웃는다. 그것도 등장 인물들의 입을 통해서 말이다. 그 결과 ‘밀실 트릭’이나 ‘다잉(dying) 메시지’ 같은 추리 소설계에 대대로 전해지는 전가의 보도들은 한낱 웃음거리로 전락하고 만다.

소설 속 주인공들이 소설을 빠져 나와 관조적 입장에서 읊는 이러한 대사들은 자기비판의 수준을 넘어서 자학에 가깝다. 그리고 이것은 진부한 설정에만 의존하는 싸구려 추리 소설의 작풍을 성토하는,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가로서의 자기반성이자 양심선언이라고 할 수 있다. 이후 새로운 방향 모색을 위한 실험을 거듭하던 게이고는 마침내 전형적인 범인 찾아내기 식의 패턴에서 벗어나 인간 내면의 심리와 갈등 묘사에 중점을 둔 인간 드라마적 소설을 쓰게 된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그가 오늘날 각광받는 추리 작가가 된 배경이기도 하다.

미스터리의 제왕이라고 불리는 히가시노 게이고가 기존의 추리 소설에 통렬한 야유를 보내는 ’명탐정의 규칙’은 ‘웃음이라는 보자기 속에 든 날카로운 비판의 칼날’ 이라는 평론가 무라카미 다카시(村上貴史)의 말처럼 통쾌한 웃음 한편으로 우리가 알던 추리 소설을 재평가하게 만드는 날카로움이 숨어 있는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