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명의 고문기술자 이근안에게는 '속죄'도 금물
악명의 고문기술자 이근안에게는 '속죄'도 금물
  • 김세영 기자
  • 승인 2012.01.19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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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손을 잃고 회개를 이루지 않은' 고문기술자

페미니스트 웹진 '이프'의 공동대표 유숙열씨(59ㆍ여)가 지난 17일 이프 홈페이지에 이근안에게 보내는 글을 올렸다. 유씨는 "당신이 스스로 목사직을 내놓으라는 얘기를 하기 위해서 글을 올렸다"며 이씨에게 "사람의 목숨을 쥐고 흔들었던 고문기술자가 성직자가 된다는 것은 언어도단이다"고 비난했다.

한편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개혁총회는 지난 14일 긴급 징계위원회에서 열고 고문기술자 전력을 애국자로 포장해 목사로서의 품위와 교단의 위상을 떨어뜨렸다는 점 등을 이유로 들어 이씨의 목사직 면직 결정을 내렸다.
겸손을 잃고 회개를 이루지 않았다는 것이 면직 결정의 배경이다.

유씨는 5·18 계엄확대 발표 이후 지명수배로 쫓기고 있던 당시 한국기자협회 회장이었던 김태홍(1942∼2011) 전 의원의 피신처를 소개했다. 이 때문에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로 끌려갔다.

그 곳에서 이근안을 만났다며 물고문 이후 "온 몸이 물에 젖어 한 여름인데도 사시나무 떨듯이 몸이 떨려왔고, 담요를 여러 장 뒤집어써도 추위가 가시질 않았다"고 회고했다. 

이근안은 1980년대 후반까지 고문기술자로 악명을 떨치다 불법체포와 고문 혐의로 수배 끝에 2000년 체포됐다. 7년 가까이 영어의 몸이 되었다가 2006년 11월경 풀려난 이 씨는 옥중에서 거친 통신과정을 토대로 목사가 되었다. 지난 2008년 10월 30일 그는 한국기독교 100주년 기념관에서 목사 안수를 받으며 '고문기술자'에서 성직자로 탈바꿈했다.

하지만 인권의 근본을 흔드는 고문기술자에게 목사 직분을 주는 것은 사회 통념상 허용할 수 없다는 지적이 불거졌다.

논란이 공분으로 바뀐 것은 김근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이 별세한 지난달 30일 이후다. 이 씨는 1985년 당시 민청학력 의장이었던 고 김 상임고문을 가혹하게 고문한 당사자다. 이 씨가 7년 동안 수감생활을 한 것도 고 김 상임고문에 대한 고문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이근안은 지난 2010년 2월 ‘일요신문’과 인터뷰에서  “지금 당장 그때로 돌아간다 해도 나는 똑같이 일할 것이다. 당시 시대 상황에서는 애국이었으니까. 애국은 남에게 미룰 수 있는 일이 아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