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대표 디자이너 앙드레김 운명을 달리하다
대한민국 대표 디자이너 앙드레김 운명을 달리하다
  • 김윤희 기자
  • 승인 2011.08.13 2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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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바이 앙드레김 1935~2010

7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 앙드레 김(김봉남)은 지난 50여년간 디자이너 외길을 걸어왔다. 그의 학력은 고등학교 졸업장이 전부다. 유학 경험도 없다. 디자이너가 되기 전에는 배우를 꿈꾸기도 했다. 1959년 ‘비 오는 날의 오후 세 시’에 프랑스 종군기자로 출연했다. 하지만 배우가 적성에 맞지 않는다며 꿈을 접고 디자이너의 길을 택했다.

그는 그림도 좋아했다. 중학교 때 누이와 여동생을 모델로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6·25 동란으로 부산으로 내려간 그는 서울로 올라온 뒤 1961년 국제복장학원 1기생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이듬해 의상발표회와 함께 소공동에 앙드레김 의상실을 열며 국내 첫 남성 패션디자이너의 탄생을 알렸다. 남자라는 이유로 사람들의 반감을 사기도 했지만 꿋꿋이 전진했다.

故앙드레김 ‘판타스틱’했다

당대 톱스타인 영화배우 엄앵란 등의 옷을 만들며 주목받았다. 1966년 프랑스 파리에서 한국인 최초로 패션쇼를 연 그는 1977년 패션디자이너 중 처음으로 대한민국 대통령이 주는 문화훈장, 1982년 이탈리아의 대통령이 서훈하는 문화훈장을 받았다. 2000년에는 역시 한국 디자이너로서는 최초로 프랑스 정부의 예술문화훈장을 받는 영예를 누렸다.

‘한국 패션계의 대부’로 통했지만 온갖 루머와 오해로 마음에 상처를 입기도 했다. 그의 독특한 말투는 희화화 됐고 옷로비 사건으로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특히, 옷로비 청문회 때 참고인으로 출석, ‘김봉남’이라는 실명이 알려지며 화제가 됐다. 새 봉(鳳), 사내 남(男)을 쓴다. 이 때문에 오히려 대중과 더 가까워졌다. 그는 억울하고 불쾌했지만 청문회 이후 좋은 일이 더 많아졌다고 말하기도 했다.

지구촌 곳곳에서 패션쇼를 개최하며 한국 패션의 위상을 높인 앙드레김은 패션은 물론 속옷, 양말, 안경, 도자기 등 다양한 분야에서 사업을 벌이기도 했다. 평생 일만 하면서 독신으로 살았지만 아들도 있다. 1988년 18개월이던 아들을 입양, 2005년 쌍둥이 손자를 얻어 할아버지가 됐다.
남성 패션디자이너 1호인 앙드레김은 지난달 말 폐렴 증세로 서울대병원에 입원, 병세가 악화돼 이날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