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굴레를 벗어나고 싶었던 그들의 꿈
[영화] 굴레를 벗어나고 싶었던 그들의 꿈
  • 김진산 외부평론가
  • 승인 2014.04.10 1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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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익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혁명과 반역의 기로

혁명과 반역의 차이는 무엇인가. 우리는 흔히 그 차이를 성공과 실패에서 찾는다. 그리고 때로는 시대상에 견주어 그것을 평가하기도 한다.

영화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은 표면적으로 반역(註 : 실패한 결과의 기준에서 이렇게 명명하도록 하자)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각자의 입장과 상처를 가진 사람들의 관계는 그들을 한양으로 이끌고 그 곳에서 그들의 결말도 맺어진다.

이준익 감독의 영화는 기본적으로 관객에게 친절하다. 상기해보자. 상업영화의 ‘흥행 감독’들이 항상 친절하기만 했는지 말이다.

박찬욱 감독의 복수 3부작 <복수는 나의 것>ㆍ<올드보이>ㆍ<친절한 금자씨>, 류승완 감독의 데뷔작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봉준호 감독의 <플란다스의 개>도 정확히는 관객에게 마냥 친절한 영화는 아니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이준익 감독이 친절하다. 관객들에게 선사하는 웃음 코드와 희망적 메시지가 영화 전반에 퍼져있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친절함 속에서 이준익 감독은 중의적 혹은 시적 표현을 즐겨 사용한다. 그의 작품에서 이런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다.

▲ 영화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 포스터 ©인터넷 커뮤니티
더욱이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은 제목부터가 시적 표현의 정점이라고 할 수 있다.

영화 속에서 황정학(황정민 분)은 이몽학(차승원 분)에게 검사는 칼 뒤에 있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자신을 세상에 드러내기보단 숨어 사는 것이 현명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몽학은 그렇게 살기 싫다 대답한다. 이 대화를 통해 혁명과 반역에 대한 그들의 생각과 이어지는 행동을 알 수 있게 된다.

이 영화가 어려운 이유는 표면적 이해와 실제적 해석에 차이가 생길 수 있음에 기인한다. 단순히 혁명과 반역에 대한 두 사람의 대결 양상은 사실 표면적으로 보이는 것일 뿐이다.

제목의 ‘구름’은 굴레와 제약을 이야기한다. 맹인인 황정학. 권력욕에 빠진 이몽학. 서자인 견자. 기생인 백지. 이들 모두는 굴레 속에서 자신들의 삶의 목표를 향해 간다.

이것이 달로 비유되는 ‘꿈’이다. 각자의 꿈을 향하여 이어진 그들의 행보는 영화의 결말로 이어지게 된다.

결국 구르믈 버서난 달이 되고자 하였던 그들의 외침. 그것이 이 영화가 이야기 하고자 하는 주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