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진국의 '펼침의 미학'] 빛의 유혹-5
[오진국의 '펼침의 미학'] 빛의 유혹-5
  • 오진국 화백
  • 승인 2015.03.08 19:5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당신이 곁에 있어도 그립다'

사랑이 넘치면 적어도 이런 감정이 된다는 것쯤은 대개 열애에 빠져본 사람은 다안다. '나 자신보다 더 나를 사랑하는 당신' 자신의 전부를 던져 사랑해 본 사람들이 하나같이 느끼는 사랑의 부피다. 교감본능에 실린 감성이 승화되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아무 소리를 들을 수도 없다. 그저 내 사랑 하나에만 모든 것을 던지고 싶을 뿐, 얄팍한 이해득실이 있을 리 없다. 설혹 이것이 독약이라도, 마시면 정말 죽는다 하여도 '당신과 함께'라는 전제만 성립되면 결단에 무슨 망설임이 필요하겠는가? 그게 사랑이다. 그만큼 사랑의 '끌림'은 자발적인 것이다.

사랑이 늘 화사하고 향기롭기만 한 것은 아니다. 가장 절정의 사랑은 소쩍새가 피울음을 토하듯 그 자체가 현란한 아픔이고 자신의 영적, 신체적 체계가 죄다 허물어지는 순간이다. 드라마나 영화의 애절한 이별만이 아픔이 아니고 정점에선 사랑도 아픔이다. 앞서 구술한 '당신이 곁에 있어도 그립다'거나 외롭다고 느끼는 것도 아픔의 변형이다. 아무리 사랑이 절정에 달해도 여전히 채워지지 않는 갈증은 완전 한 사랑이란 애당초 존재하지 않는다는 반증이다. 상대가 부족하거나 서로의 사랑이 미진해서가 아니고 사랑의 본질이 그렇다는 이야기다.

사랑이란 '끌림'에서 시작되고 그러한 '끌림'은 유혹과 부분적으로는 일맥상통 하기도 한다. 유혹의 본질인 '꼬드김'과는 과정도 본질도 다소 다르지만 정작 유혹을 하는 당사자와 유혹을 당하는 과정도 긴장감은 매일반이다. 마치 덫을 쳐놓고 기다리는 거미처럼 그 덫에 빠트리려는 자와 그럴 줄 알았다 하더라도 부나방처럼 빨려들지 않을 수 없는 것이 또 박진감 넘치는 유혹의 묘미다. 유혹의 아름다움은 피를 말리는 긴장감에 있다 문제는 유혹이 중독성이 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유혹이라는 마법을 건 사람이 되려 자신의 덫에 걸릴만큼 맹독성이 있는 것으로 좀처럼 탈출하기 어려운 것이라는 데 심각성이 있다.

장식용 그림이란 장르도 있는가?

분명히 19세기까지 과거에 그런 장르는 없었다 정통회화가 아니면 격이 떨어지는 것 쯤으로 치부하던 시대에선 이런 '아트포스터' 같은 작품이나 '데코레이션' 형태의 그림은 아예 작품으로 취급도 하지 않았었다.

그럼에도 나는 이러한 미술 작품의 부담없는 즐기기에 유난히 관심이 많은 사람 중 하나다. 특별히 예술성을 논하지 않더라도 그저 눈요기 만으로도 즐거운, 그런 가벼운 그림은 존재하면 안 되는가 말이다.

이 그림처럼 약간 제작의도가 달랐다면 하나의 정물화로 정착될 수 있는 그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처음부터 장식학로 가닥을 잡았기 때문에 정통적인 구성에서 자유스러울 수 있었고 가사도, 곡도 없는 멜로디를 '에드립'처럼 자신도 모르게 흥얼거리듯 즉흥적인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었다. 혹시 누군가 잘났다 합시고 나에게 따져 물으면 단 한 마디의 답을 할 용기만 있으면 된다 '그래, 이거 예술작품 아니야..'라고 말할 용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