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우리의 역사는 반도를 넘어 '대륙의 역사'다
[기고] 우리의 역사는 반도를 넘어 '대륙의 역사'다
  • 정귀출 SLK국보 부사장
  • 승인 2015.03.09 0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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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귀출 SLK국보 부사장
現 바른댓글실천연대 고문 / 前 LG상사 동경지사장 / 서울대학교 공대 졸업

 역사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과 불과분의 관계를 갖고 있기에 우리의 왜곡된 지난 역사를 면밀히 분석해 보다 정확한 우리의 역사를 안다는 것은 현재의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를 제시해 줄 수 있기에 매우 중요하다고 본다. 

우리의 역사책을 보면 우리나라는 침략 받고 반도의 왜소한 국가로 축소 지향적으로 기술되어 있으며 우리는 생존을 위해 몸부림치는 듯한 인상을 지울 수 없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역사는 반도의 역사를 넘어 대륙의 역사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우리의 인식과 많이 달라질 것이며 또한 세계사를 움직인 민족으로서 큰 자긍심을 갖고 국내와 세계를 보면서 당당하게 임하게 될 것으로 본다.
 
우리의 역사는 이병도씨를 비롯한 식민사관 학파들에 잘못 편찬되고 식민사관 학파들과 사대주의 학파들이 우리의 역사학계를 주도하고 있는 탓에 잘못된 역사를 당연한 것처럼 배워 왔고 지금도 그렇게 인식하고 있다. 특히 삼국시대와 고려를 포함한 고대사를 보면 교과서는 축소지향적인 반도사관에 사로잡혀 있어 우리의 발목을 우리가 잡고 있다. 이것은 찬란한 역사와 문화를 창출한 선조들과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에 대한 크나 큰 배신이며 우리 스스로를 비하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라고 본다.
 
우선 삼국시대의 백제가 대륙과 만주에 있었다는 많은 중국 자료가 있는데 그 일부를 여기에 소개하고자 한다.
 
"진나라 때 고구려가 요동울 차지하자 백제도 요서를 차지하여 진평군을 두었다, 521년 보통 2년, 다시 강국이 되었다" <양서>를 비롯한 서토25사는 백제가 요서를 지배한 때가 진나라 때라고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양서>는 백제가 일시 위축되었다가 521년에 다시 강국이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1777년 청나라 건륭 42년 한림원에서 편찬한 <만주원류고>는 "금주, 의주, 애훈이 모두 백제땅이 되었다"고 했는데 이는 모두 요하 좌편에 있는 지명이다. 백제의 요서경영을 다시 한 번 증명해 주는 것이다.
바로 이 지역에서 발견되는 고고학적 성과도 이를 증명한다. 조양시(서요하)와 요양시(요동반도)에서 나타난 고분은 우리나라 황해도 ‘안악3호고분묘’와 쌍둥이처럼 닮았다. 완벽한 백제의 만주진출 증거이다. 또한 <송서><남제서>에는 백제가 대륙 7군에 좌현왕, 우현왕, 매라왕, 벽중왕을 파견한 가사도 실려 있다.
 
우리가 배운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시대의 다음은 통일신라이고 그 다음은 고려라고 한다. 그렇다면 고구려가 멸망한 땅에 세운 발해는 우리민족의 나라가 아니고 이방인이 세운 나라인가?
 
역사의 시대구분은 삼국시대(기실은 가야를 포함한 사국시대) 다음은 통일신라시대가 아니고 남북조시대로 명명해야 한다. 즉, 남은 신라(소위 통일신라)이고 북은 발해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신라(통일신라)의 강역도 대동강유역에서 함경도 원선만 이남으로 되어 있는 것도 오류가 있다. 삼국시대의 6세기 신라 진흥왕순수비인 황초령비와 마운령비가 통일시라시대의의 국경이라는 원산만 위에 있기 때문이다.
 
또 청나라 때 편찬한 <만주원류고>에는 통일신라의 강역은 현재의 만주지역을 포함한 것으로 기술되어 있다. 즉, 고구려가 668년에 망하고 당나라와 신라의 8년전쟁(석성전투/석문전투 등)에서 요동반도의 9주를 확보하였으며 발해가 732년 당나라 등주(산동반도)를 공격할때 신라가 압록강 국경까지 밀려났던 것이다. 신라의 9주는 개원(길림성)과 철영(요녕성)사이에 있다고 <만주원류고>에서 기술했다. 이것은 <거란지리지>에도 나타나 있다. 그리고 일본의 한국 강점기 이전의 일본 역사책에도 통일신라의 강역은 압록강 이북으로 그 북쪽은 발해로 되어 있었다.
 
다음은 발해에 대해서 알아보자. 발해는 고구려가 668년에 나당연합군에 의해 망하고 나서 신라가 당과의 9년 전쟁으로 9주(요동반도)를 차지하며 통일을 한 677년 이후 20여년이 지난 698년 고구려 후예인 대조영이 고구려 유민을 모아 당에 대항하여 세운 것이 대진 발해국이며 동명성국이다. 926년에 거란국의 야율아보기에 의해 망하였으니 소위 통일신라가 망하기 10년 전의 일이다. 발해의 강역은 고구려가 차지했던 강역을 대부분 회복하였고 연해주 연안은 더욱 확장하였다. 발해가 일본에 보낸 국서에 따르면 발해는 분명히 고구려의 후국이다. 발해 제4대 문황 대흠무는 일본에 보낸 국서에서 "고구려국왕 대흠무"라고 기록했다. 이러한 발해를 현재의 우리나라 역사책에는 확실하게 하지않고 애매하게 언급하니 중국이 동북공정을 내세우고 있는 것이다.
 
고려강역에 대한 기술 또한 너무 축소 왜곡된 곳이 많다. <중국자치통감>에는 "926년 발해의 부여성은 고구려의 부여성이다. 이 당시 고려왕 왕건이 나라를 세워 혼돈강(송화강, 요녕성 혼하, 요녕성 혼강)을 차지하였다. 그러나 혼돈강 서쪽은 차지하지 못했다"라고 했으며 <중국송사>에는 "985년 고려왕 왕치(성종)가 송나라 사신 한국화에게 말하기를[거란은 요해(요동반도)의 바깥에 있고 대매하(요녕성 혼하)와 소매하(길림성 매하구시)의 두강으로 막혀 있으며 여진은 본래 주거지가 없었다]"라고 기술되어 있다. 246년 고구려 동천왕이 위나라 관구검에게 패해 쫓겨 난 곳이 매구(매하구시)였는데 그 매구가 지금의 길림성 매하구시이다. 또한 고려의 행정구역수(584개)가 조선의 행정구역수(327개)에 비하면 2배인 것도 상기해볼 필요가 있다.
 
강감찬 장군의 귀주대첩(1018년)은 거란과 지금의 압록강 아래에서가 아니라 만주에서 싸워 이긴 큰 승리이다. 몽고의 역사가 적힌 <원사>의 '동녕로'에는 고려인 최탄 등이 서경부 주현진 60성을 들어서 원나라에 항복하였다. 그리고 '심양로'에는 고려인 홍복원이 서경도호부 산하 귀주등 40여성을 들어서 원나라에 항복하였다고 했다. 그렇다면 강감찬 장군의 '귀주대첩지'는 심양로(요녕성 심양시)에 있었다는 뜻이다.
 
고려의 천리장성(1033년)은 '서해'의 '국내성' 경계 '위원보'에서 시작되었다고 하는데, 고구려의 국내성은 요녕성 개원시 용담산성이다. 이곳 근처에 ‘위원보’가 있는데 그곳이 천리장성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즉, 고려의 천리장성은 북쪽의 만주에서 남쪽의 압록강(지금의 압록강)방향으로 건설되었다(한반도의 서쪽에서 동해안쪽이 아니다).
송나라의 <고려도경>에는 "고려는 남쪽은 요해(발해)로 막히고 서쪽은 요수와 맞닿고 북은 옛 거란 땅과 동쪽은 금나라와 맞닿았고 연속되고 또 왜 유구 탐라 흑수 모인 등의 나라와 견아상제(경계가 일정치 않고 복잡하게 서로 얽혀 있음) 모양으로 되어 있다"라고 기술되어 있다.
 
우리나라의 강단학파들은 마음의 문을 열고 재야학파와 함께 중국에 있는 많은 역사자료를 공동으로 연구하여 참된 우리의 역사를 편찬해 주기를 학수고대하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