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랜드 이거 아니?] 혁신의 아이콘에서 품절 대란의 주인공으로...브랜드 '발렌시아가'
[브랜드 이거 아니?] 혁신의 아이콘에서 품절 대란의 주인공으로...브랜드 '발렌시아가'
  • 이지원
  • 승인 2020.01.06 1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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삭스 스니커즈 열풍을 주도했던 브랜드, '발렌시아가' (사진=발렌시아가 공식 인스타그램 계정에서 캡처)

최근 셀럽들에게 가장 핫한 브랜드가 있다. '삭스 스니커즈' 열풍을 주도했던 브랜드, '발렌시아가'가 그 주인공이다.

발렌시아가는 명품 브랜드의 명성과는 달리 스트리트 특유의 감성으로 최근 젊은 세대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다. 하지만 이들의 획기적인 행보는 처음 있는 일이 아니다. 발렌시아가의 창립자인 크리스토벌 발렌시아가의 애칭이 '예언의 불꽃'이라 할 정도로 그들은 트렌드에 앞섰다고 전해진다.

그렇다면 이들이 트렌드에 발빠르게 대응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발렌시아가는 크리스토벌 발렌시아가에 의해 탄생한 명품 패션 브랜드이다. (사진=발렌시아가 공식 인스타그램 계정에서 캡처)

발렌시아가는 스페인 출신 디자이너인 크리스토벌 발렌시아가에 의해 탄생한 명품 패션 브랜드이다. 

크리스토벌 발렌시아가는 1895년 스페인의 한 어촌 마을에서 태어났다. 어부인 아버지와 바느질을 하던 어머니의 밑에서 자란 발렌시아가는 어머니의 일을 도와 바느질에 곧잘 소질을 보였으며, 어렸을 때부터 옷에 대한 관심과 재능을 키울 수 있었다.

이처럼 뛰어난 솜씨와 계속된 노력으로 발렌시아가는 어린 시절부터 옷 한 벌을 거뜬하게 만들 수 있는 실력을 갖추게 됐다. 그 후 13살이 되던 해에는 그의 운명을 바꿀 한 가족을 만나게 된다. 마드리드에서 온 카사 토레스 후작가는 발렌시아가를 본인의 집에 초대하며, 후작가의 부인이 입고 있던 드레스를 더욱 더 깔끔하고 정교하게 만들게 됐다.

그 계기로 발렌시아가는 후작가 부인의 눈에 띄게 됐으며, 곧 '테일러 고메즈 하우스'라는 이름의 부티크에서 훈련을 받게 된다. 테일러 고메즈 하우스는 산 세바스찬에 위치해 있었다. 왕실과 부유층의 휴양지인 산 세바스찬에서 훈련을 받게 되며 자연스레 발렌시아가는 스페인 상류층의 문화와 취향, 엄격한 영국식 테일러링을 배울 수 있었다. 이러한 경험은 곧 브랜드 발렌시아가의 탄탄한 기반이 됐으며, 본격적으로 패션계에 발을 들인 발렌시아가는 차근차근 최고의 자리에 다가섰다.

1911년에는 여성복 테일러링을 시작했으며, 2년 만에 여성 테일러링 워크숍의 수석이 될 만큼 빼어난 실력을 자랑하기도 했다. 그 후 1918년, 발렌시아가는 자신의 이름으로 첫 번째 컬렉션을 선보였다. 이후 많은 사랑을 받아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로 사업을 확장하기도 했다. 뛰어난 바느질 솜씨와 완벽주의를 고집하던 그의 성격은 그를 유명 디자이너의 자리에까지 오르게 했다.

뛰어난 테크닉과 완벽주의 덕분에 발렌시아가는 스페인 내 최고의 디자이너로 불렸다. 하지만 1936년 일어난 스페인 내란으로 인해 더 이상 부티크를 운영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1937년, 파리에 발렌시아가 쿠튀르 하우스를 설립하고 본격적인 의류 비즈니스를 시작하게 된다. 

발렌시아가는 유행을 따라가지 않는 혁신적인 행보를 선보였다. (사진=발렌시아가 공식 인스타그램 계정에서 캡처)

스페인에서는 최고의 디자이너로 명성이 자자했던 그이지만, 파리에서는 신예 디자이너에 불과했다. 하지만 스페인과 파리를 넘나들며 샤넬, 비오네 등 유명 쿠튀르를 연구했던 안목으로 인해 그의 사업은 파리에서도 성공적인 행보를 거두게 됐다.

이때 힘이 된 것이 '인판타'라는 드레스이다. 17세기 스페인 공주 초상화에서 영감을 받아 만들어진 드레스는 그를 하루 아침에 패션계의 유명인사가 되게 만들어 줬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원자재 부족으로 인해 많은 디자이너들이 문을 닫았지만 발렌시아가는 뛰어난 테크닉과 기술로 부족한 원단으로도 드레스의 풍성한 드레스를 만들었으며, 스스로 드레이핑과 재단을 하며 완벽한 바느질을 선보이는 몇 안 되는 '쿠튀리에'라는 소문도 그를 스타덤으로 이끌었다.

이후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에도 발렌시아가는 유행을 따라가지 않는 혁신적인 행보를 선보였다. 인기 있는 트렌드보다 10년 정도 앞서간 패션을 선보인 그는 '예언의 불꽃'이라 불리며 계속된 성공을 맛볼 수 있었다.

1950년대에 접어들며 발렌시아가의 감각은 점점 대담해졌다. 개성있고 비대칭적이며, 유행에서 벗어난 그의 디자인으로 인해 전성기를 맞게 된다. 하지만 시간이 흐른 후 패션의 흐름 또한 변화했으며, 이후 1968년 폐점하기까지 발렌시아가는 파리 최고의 쿠튀르 하우스라는 명성과 쿠튀리에로서의 자존심을 지키고자 은퇴를 선언한다. 

이후 1972년, 발렌시아가의 타계와 함께 자연스레 발렌시아가의 명성 또한 잃게 된다. 다른 명품 브랜드에 비해 입지 또한 좁아지게 된다. 하지만 현재의 발렌시아가 위치가 있듯 재도약의 기회 또한 화려하게 찾아왔다. 

발렌시아가는 재도약 또한 화려했다. (사진=발렌시아가 공식 인스타그램 계정에서 캡처)

1996년, 브랜드 장폴고티에의 디자이너였던 니콜라스 게스키에르가 발렌시아가의 수석 디자이너가 되고 '모터백'으로 화려한 재기를 꾀한 것이다. 이후에도 스타 디자이너 알렉산더 왕의 손을 거친 발렌시아가는 2016년 베트멍의 뎀나 바잘리아가 그 뒤를 맡게 되며 또 한 번의 전성기를 맞게 된다. 해체주의로 유명하던 뎀나 바잘리아는 프렌치 락시크를 표방하던 발렌시아가의 이미지와 적절히 결합해 발렌시아가를 트렌디한 브랜드로 탈바꿈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이렇듯 다양한 디자이너들의 개성으로 빚어진 발렌시아가는 현재의 캐주얼하면서도 고급스러운 아이덴티티를 완성할 수 있었다. 이후 전 세계의 셀럽들이 발렌시아가의 제품을 착용하며 국가를 막론하고 성장하게 됐으며, 스트리트 감성과 명품의 고급스러움을 모두 느낄 수 있는 디자인으로 현재는 품절 대란을 잇고 있다.

 

(데일리팝=이지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