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진국의 '펼침의 미학'] 鶴-5
[오진국의 '펼침의 미학'] 鶴-5
  • 오진국 화백
  • 승인 2015.06.30 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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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지 않는 새는 새도 아니다.
오랜 잠에서 깨어난 학의 비상에
어깨가 스물스물 하지 않으면
너무 오랫동안 박제된 삶에
길들여 진 것이다.

내가 학을 그릴 때, 무의식적으로 도자기가 따라다니는 이유를 딱히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아마도 비색청자에 그려졌던 학들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훨훨 날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연유가 아닐까?

한편으로는 서양화를 그리는 내가 늙은 소나무 곁에 한가로이 고개 떨군 松鶴圓(송학원)을 그릴 수도 없고 그림의 구성상 학을 제외한 여백의 처리가 고민이었을 수도 있다.

이런 동식물을 다룰 경우, 포커스를 압축하여 대상을 정밀하게 파고들면 영락없는 동식물 도감이 되기 십상이고 약간 분위기를 고즈넉하게 잘못 연출하면 어디선가 수도 없이 보았던 사진작품이 되고, 여차하면 연하장이나 카렌다그림이 되는가 하면, 약간 도안형 기법을 잘못 사용하면 영락없이 송학의 1월 화투장으로 변모하기에 그리기도 전에 접근부터 조심스러운 것이다.

아무튼 날짐승은 날아야 제 격이다.

붙박이처럼 틀어박히면 이미 새가 아니다. 청자에 그려졌거나 각인되어 1000년을 잠자고 있던 학들이 어느 날, 주술을 풀듯 잠에서 깨어나 도자기를 박차고 후드득 비상하는 장면을 상상해 보면 그 얼마나 장관일까?

그게 학이건 까마귀건 날짐승이라면 오랜 박제에서 벗어난 자유를 향한 비상은 가슴을 설레게 할 충분한 '모티브'인데다 어쩌면 현대인에겐 염원 같은 것이 아닐까? 이런 경우, 도자기는 조연으로서의 역할을 충분히 소화할뿐더러 그 존재마능로도 마치 '애니메이션' 영화처럼 '스토리텔링'을 충분히 구성하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