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선 ISSUE & FOCUS] 한일관계, 최대 위기 이렇게 풀고 가자 (上)
[한선 ISSUE & FOCUS] 한일관계, 최대 위기 이렇게 풀고 가자 (上)
  • 한반도선진화재단
  • 승인 2015.07.30 1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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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형 한반도선진화재단 기획·홍보위원장/한림대학교 교수

올해는 1965년 한일국교정상화 50돌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양국관계는 최악인 상황이다. 양국 정상이 3년이 지나도록 정상회담조차 열지 못하고 있다. 이대로 임기를 끝낼 수도 있다는 말이 회자되기 시작한지도 오래다. 무엇이 양국관계를 이토록 멀어지게 만들었는가. 갈등이 불거질 때마다 중장기 대응책 없이 졸속, 땜질, 늑장 대응으로 일관해 온 탓이다. 그러나 2010년대 들어 국내외 상황은 급변하기 시작했다. 결국 일본은 2015년판 외교청서에서 한국에 대해 '자유, 민주주의, 기본적 인권 등의 가치를 공유한 이웃'이라는 표현 대신 '가장 중요한 이웃'으로 표기했다. 외교 단절을 방불케 할 지경에 이르렀다. 이렇게 거의 모든 갈등요인이 정치 이슈화되고 있다.

냉전논리로 봉합된 갈등요소, 탈냉전에 대비 못해

양국 갈등 5대 현안으로 ▲독도 ▲위안부 ▲강제징용자 ▲역사교과서 ▲야스쿠니 신사참배 문제를 들 수 있다. 이 중 어느 하나 해결의 실마리가 잡히질 않고 있다. 오랜 양국의 고증은 물론, 메이지 정부도 독도를 대한민국 영토로 인정한 바 있지만, 노일(露日)전쟁을 기화로 일본이 강제 편입한 것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후 패전 일본의 영토 확정 시 우리가 되찾았다. 실효지배라는 말 자체도 어울리지 않는 우리의 고유영토임에도 일본은 줄기차게 분쟁지역화를 시도하고 있다.

일본은 또 위안부와 강제징용자 문제도 1965년 기본조약과 청구권 협정 등으로 완전하게, 최종적으로 해결된 것이라는 입장이다. 초등, 중·고교 역사교과서도 일본 정부가 여전히 황국사관에 의거해 식민지배와 태평양 전쟁의 정당성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고 학습지도 요령 개정과 검정 과정에 과잉 개입해 오고 있다.

김종필 전 국무총리는 소위 김-오히라 메모 직후 일본은 경제협력자금, 한국은 청구권자금이라고 각자 좋을 대로 국회에 보고하자 약조했노라고 당시를 회고한 바 있다. 독도문제도 당시는 한일회담 의제가 아니었음에도 일본은 정상화 교섭 타결시간에 임박해서도 분쟁해결에 관한 교환 공문에 독도를 명기해 분쟁지역화를 시도했었지만, 한일조약 서명식 당일 사토 수상이 스스로 독도라는 글자를 먹으로 삭제했다고 당시 외무부 조약과장이던 오재희 전(前) 주일대사가 생생히 증언하고 있다. 당시 동서가 대치한 상황에서 양국은 이렇게 현안을 서둘러 봉합하면서 서방 진영의 일원으로 나서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른바 냉전과 안보 논리 때문이었다.

이러한 전후 처리방식 이후 25년이 지나면서 과거사, 야스쿠니 신사 참배, 역사교과서 문제 등을 둘러싼 망언과 식민지배에 대한 사죄가 반복되었다. 한국이 산업화 시대를 넘어 민주화의 도정에 들었고, 일본이 80년대 메카트로닉스(Mechatronics) 혁명이 개화해 일본의 세기를 구가하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되돌아보고 국제적 목소리를 높이려던 참이었다. 되돌아보면 세계화(globalization)와 IT혁명이 몰고 올 국제적 이해관계와 시민사회의 의식변화에 좀 더 충실히 다가가 양국 관계를 새롭게 디자인 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지나치게 낙관주의에 빠져 무사 안일했다.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의 천황 방문, 고노담화, 무라야마 담화, 김대중-오부치 공동선언 등 총론만 있고 각론은 없는 이벤트에 취해 상대를 직시하지 못했다.

특히 90년대 장기 불황 속의 일본은 내향성이 강해지고 리더십 부재가 일상화되고 있어 자신들의 피와 땀으로 지켜낸 평화와 인권이라는 소중한 세계적 보편가치를 공유하고 창달하는데 무관심했었다. 한국은 IMF 위기를 혹독한 구조조정으로 극복한 이후 2, 3개의 글로벌 상품으로 세계시장에서 선전하면서 어느새 일본의 물심양면의 지원과 협력에 너무나 무관심했다. 일본이 우리를 도왔던 사실을 진정성 있게 수용하고 인정하는데, 지나치게 인색했다. 물론 일본의 한국시장 확보를 위한 것이었다고 하더라도 당시로서는 우리의 현실이 더 다급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청구권 자금 8억 달러, 67년 수출연불신용 추가 2억 달러 지원에 이어 1970년부터 1880년까지 2600억 엔 차관이 있었고, 해외기술자연수협회 등을 통한 기술자 연수는 2000명 이상에 달했다. 이를 통해 포항제철, 경부고속도로, 서울지하철 1호선, 소양강댐 건설 등을 통해 우리의 압축성장 기초를 놓았다. 일본은 80년대 초에도 안보 논리에 부응해 40억 달러 차관을 제공했다. IMF 위기 시에 한국에서 인출해 간 달러를 현재로서 측량하기 어렵지만, 그보다는 IMF 구제금융 570억 달러 중 일본이 지원한 100억 달러가 훨씬 컸던 건 사실이다. 2008년 세계금융 위기 시에도 양국 중앙은행 간 혹은 재무성 간 통화 스왑을 통해 700억 달러의 가용자금을 확보함으로써 외환시장을 안정시켰다. 이외에도 외국인 직접투자는 우리 생산현장의 개량과 개선, 나아가 제조업의 융합의
기틀이 되었다.

일본 역시 50년대 초 한국전쟁 3년간 특수 22억 달러로 잠재성장 한도를 2배 확충해 전후 첫 불황을 극복할 수 있었고, 한국은 일본의 고급부품 소재의 수출시장으로 써 장기 불황기의 일본경제를 강력하게 뒷받침해 온 전략시장이었다. 이제는 글로벌 경쟁력을 키워가는 경쟁과 협력의 장이 되고 있다.

이 글은 한반도선진화재단 'ISSUE & FOCUS'에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