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진국의 '펼침의 미학'] 이방인의 섬
[오진국의 '펼침의 미학'] 이방인의 섬
  • 오진국 화백
  • 승인 2015.08.28 1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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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 위를 둥실둥실 떠다니는 섬들은 언제나 일렁이는 그리움이었다.
 
버스 뒷자석에 아무렇게나 갈겨 써 둔 낙서처럼 수취인도 불명한 소포 꾸러미였다. 하얀 이빨을 끊임없이 들이대며 밀려드는 폭풍전야에도, 짙은 구름 속에 희미하게 계면쩍은 얼굴을 마주한 달빛 아래에서도, 실랑이 한마디 못 하고 그저 밀려갔다가 밀려오는 부표였고 때로는 존재를 포기한 생명처럼 흐느적거리는 질량 덩어리였다.
 
언제부터인가 섬은 침전된 응혈처럼 가슴 속에 까만 자국을 남기고 두근거림의 파장이 콩닥콩닥 울려 퍼지면 혈관을 타고 파도소리처럼 기다림을 재촉하곤 하였다.
 
앉아 있지도 서 있지도 못 하고 서성이는 마음이 수평선만큼이나 까마득한 아쉬움으로 진종일 안절부절 한 가운데 어느새 내 마음 속의 그녀도 섬이 되었다.
 
나는 어렸을 적부터 늘 섬은 배처럼 생각되었다.
 
어쩌면... 섬에는 해적들이 숨겨놓은 금은보화가 가득한 보물 상자들로 가득하거나 인어공주가 사는 작은 성이 있을 지도 몰랐다. 문명세계와는 철저히 단절된 원초적 자연이 가지는 신비로움은 아마도 어떤 글로도 형언할 수 없는, 미지의 꿈같은 존재 였을 것이다.
 
섬은 뭍에서 떨어져 댕그라니 바다 한 가운데 떠 있지만 아니 떠다니지만 바로 그런 이유만으로도 섬의 존재는 언제나 고독하면서도 내밀한 이야기가 많이 함축되어 있을 것 같은 대상이었기에 늘 동경하고 상상만 하여도 볼이 상기될 만큼 가슴을 설레곤 하였다.
 
어느 날 섬은 그리움이라든가 기다림, 유배된 자의 망향가처럼 애잔한 아픔으로 불리게 되었다. 섬은 밤마다 꿈을 꾸고 하얀 포말로 이빨을 드러내는 파도소리에 잠을 설치기도 하고 먼 육지 선창가에서 실려 오는 바람결에 혹여나 내 님이 계시지나 않았을까? 귀를 종긋 세우기도 하였다.
 
남루한 어선 두 척이 작은 불빛 밝히며 파수군인 양 파도에 흔들려도 세월은 물같이 흘러흘럴 모래톱 위에 가지런히 찍힌 물새 발자국처럼 한 줌 바람에도 금방 사라지는 허망함만 실어다 주었다. 
 
야속하다 말다 사람 냄새, 분 냄새, 술 냄새, 어느 것 하나도 머무는 법이 있던가? 시도 때도 없이 들렸다 가는 간이역의 정거장처럼 섬은 늘 그 자리에 있어도 육지로 나간 아들 녀석을 생각하듯 제 몸 하나 문드러지는 것에 조금도 연연하지 않았다.
 
나이가 들어서 조망해 본 크고 작은 섬은 움직이지도, 일렁거리지도 않는 그저 육지의 연장이었는데 바닷물의 수위가 육지와 섬을 구획하는데 불과하였다.
 
연안의 섬은 통통배 하나로 건너다닌다는 것 이외에 하등 뭍과 다를 바 없었고 대부분 사람이 사는 곳이면 있을 것은 다 있는, 보통 시골의 외지였을 뿐이었다. 게다가 더욱 얄미운 것은 말만 섬이지, 고급차도 굴러다니고 HD-TV며 인터넷도 다 깔려서 곳곳에 PC방도 즐비한데다 스마트폰이 보급되고부터는 더더욱 공간적 거리를 전혀 느낄 수 없는 육지의 연장이었다.
 
서울사람 뺨치는 능숙한 장사수완하며, 지나가는 학생들의 운동화마저도 무슨무슨 '메이커' 신발을 신고 다녔고 무슨 어촌계라는 완장 두른 사람들이 자기네 섬의 어패류를 보호한답시고 (사실은 이 섬에 있는 것은 모두 우리들 것이니 손대지 말라는 이야기지만) 겨우 낚시꾼이 손으로 잡는 물고기 몇 마리 외는 조개 하나도 건드리지 못하도록 눈을 붉혔다.
 
이게 무슨 내가 동경하던 섬이란 말인가?
 
그랬다. 섬이 증발한 것이다. 아니면 그 섬들이 다 어딘가로 떠내려 간 것이었다. 내 안의 섬은 내 안에만 존재하는 것이지, 현실세계 어디에도 없는 노란 피안의 세계였을 뿐이었다. 그렇게 떠내려간 섬들을 생각하며 망연자실, 수평선만 바라보면 울음이 나온다.
 
나이가 먹은 것이다. 다 그렇게 마음속에 꿈이란 보따리를 채 풀어보지도 못 하고 사라지는 것이 또 인생
이 아니던가? 섬만 떠내려가는 것은 아니다. 인생도 그 숱한 섬들처럼 그렇게 두둥실 소리 없이 하나둘 명멸하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