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화 대부' 김근태 별세
'민주화 대부' 김근태 별세
  • 정수백 기자
  • 승인 2011.12.30 1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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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0일 새벽 별세한 김근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은 거의 모든 삶을 민주화 운동에 투신한 민주화의 대부였다. 그는 1967년 당시 대선을 부정선거로 규정하고 규탄시위를 벌이다 경찰에 붙잡혀 제적을 당한다.

그는 72년 대학을 졸업한 후 서울대생 내란음모사건, 74년 민청학련(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 사건에 연루된 데 이어 75년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다시 수배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이 때문에 11년 동안 얼굴을 감추고 숨어 지내며 재야운동에 몰두했다.

김 상임고문은 그러다 83년 9월 전두환 정권 최초의 저항단체인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을 결성했다. 또 그는 민청련의 최초 의장을 역임했다.

이 단체에는 이해찬 전 국무총리를 비롯해 문학진 강창일 의원, 정봉주 전 의원 등도 소속돼 있었다. 민청련은 전두환 정권에 대한 저항에 적극 나서는 동시에 재야운동세력의 양성소 역할을 자임하며 광범위하게 민주화운동을 확산시켜 나갔다. 

그러나 그는 민청련 결성을 이유로 85년 구속되기에 이른다. 이 때 '고문기술자' 이근안씨에 의해 남영동 대공분실로 끌려가 갖은 전기고문과 물고문을 당했다. 훗날 그는 이에 대해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었다"고 회고했다.

그가 전기고문 등을 받은 사실이 전세계에 알려지면서 로버트케네디 인권상이 주어지기도 했고 독일 함부르크재단은 그를 '세계의 양심수'로 선정했다. 세계가 그의 투쟁을 주시하고 평가한 것이다.

그런 중에도 김 상임고문은 6.10민주화항쟁으로 민주화 요구가 절정에 달한 87년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연)'을 결성해 노태우 정권 내내 권력에 맞섰다.

이렇듯 민주화 운동에 몸을 던졌던 그가 제도권의 현실정치에 나선 것은 95년이다. 그는 당시 평민당의 후신인 신민주연합당과 꼬마 민주당이 통합해 만들어진 새 민주당의 부총재직을 맡으면서 정계에 발을 들여 놓았다.

그 해 김대중 전 대통령이 정계에 복귀해 국민회의를 창당하자, 그는 국민회의로 옮겨 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당선됐다. 이후 내리 3선(15·16·17대)을 했다.

'정치인 김근태'의 삶도 순탄하진 않았다. 그는 진보 내에서도 또 다른 진보세력으로 꼽혔다. 99년 국민회의의 당 쇄신위원회 위원장을 맡아서는 '개혁'이라는 과제를 중심으로 활동을 벌였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이 참여했던 2002년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에서는 정치자금 문제로 구설수에 휘말렸지만 그는 양심선언을 함으로써 그 문제를 털어냈다. 민주당을 나와 열린우리당으로 갈 때는 '석고대죄하는 심정으로 국민들의 용서를 구한다'며 단식을 하기도 했었다.

2003년 10월에는 열린우리당의 원내대표를 맡아 17대 총선을 이끌었고 참여정부 아래에서 보건복지부장관을 지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대중과의 접촉면을 넓혔고 그래서 대권주자 반열에 오르기도 했다.

그러나 2008년 서울 도봉갑에서 18대 총선에 출마했던 그는 처음 출마한 신지호 한나라당 의원에게 1200표 차로 분패하는 정치적 좌절을 겪었다. 그렇지만 김 상임고문은 민주진보세력이 재집권할 때를 대비해 스터디그룹을 만들어 가동하는 등 현실정치의 끈을 놓지 않았고 최근에는 야권통합에도 힘을 보탰다.

그의 별세 소식이 전해지자 민주진보진영은 안타까움 속에서 "민주화의 상징이 졌다"는 탄식과 함께 모두 한마음으로 깊은 애도를 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