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진국의 '펼침의 미학'] 꽃의 분노
[오진국의 '펼침의 미학'] 꽃의 분노
  • 오진국 화백
  • 승인 2015.03.18 1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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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꽃의 분노 2011 Digilog Artworks (3401) Image size 5000x5000 Pixels (71.5M) Resolution 300dpi

사실 나는 평소에 단순히 '꽃이 아름답다' 라고 지나치길 꺼려했었다.

물론 이것은 화병에 담긴, 꺾어진 꽃을 두고 하는 말이지만, 꽃이 아름다운 줄 누가 모르랴? 그런데 꽃도 생명 인데 누구 좋으라고 마냥 관상용으로 속도 없이 즐거울까? 라고 생각하면, 아니 내가 그 입장이라면 즐거울 리 만무하지 않은가? 나 좀 그냥 그냥내버려두지, 화병에 장식품처럼 꽂아두고 스쳐 지나가는 눈요기로 존재한다면 엄동설한 겨우내 싹 틱우고 어렵사리 이룬 화개(花開)의 의미는 대체 무엇이며 아무리 말 못 하는 식물이라도 그렇지, 분통이 아니 터질 수 있겠는가?

사람이 살면서 때로는남의 입장이 되어보고, 경우에 따라서는 사람이 아닌 다른 유기체나 무생물의 입장도 되어 보아야 한다. 살아서 반응하는 생물에게만 국한된 이야기는 당연히 아니다.
벽장속에 개어둔 지 오래되는 '머플러'며 오래된 골동품 가구도 되어 보고 수족관에서 운명처럼 맞을 죽음을 앞둔 물고기도 되어 보고 폐기처분만 기다리는 공중전화 박스의 빨간 전화기도 되어 보고 가끔은 손 대지 않는 피아노나 기타에게도 애정의 눈길을 한 번씩 주어야 한다. 그런 것들이 우리와 동시대를 사는 길동무이기에 소중하지 않은 것이 어디 있던가?

있는 그대로 두고 공존하는 세계가 절실한 요즘이다. Let it be.. 있는대로 봐주면 좋을껄 귀하디귀한 생명을 온갖 손질로 변형을 가하고도 어디 한구석 미안한 마음도 없다. 남의 집 귀한 자식 데려와서는 온갖 유교적 법도를 이야기 하며 욱박지르질 않나, 뜯어고치고 '캐어' 한답시고 아예 개조 작업을 하면서도 오히려 당당하기만 하다. 꽃도 자폭하고 싶은데 구겨진 조간신문 사회 면을 보는 사람이라고 극단적인 분노가 없을까?


예술 창작이 부지런하다고 되는 것이라면 누가 못 할까?

적어도 그것을 수행하려면 언제나 미묘한 감정의 파장에 즉각 응답할 수 있는 긴장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열린 마음에서의 해맑음과 번득이는 긴장이 서로 맛 물릴 때, 가끔 제 자신도 놀라는 무엇이 탄생된다. 언젠가, 어디선가 서야할 기관차이지만 고갯길을 오르자면 숨 가쁘기는 저나 나나 매 일반이다. 목구멍에서 거친 쉿소리가 난다. 숨도 가쁘고 그나마 내 세우고 자랑스럽던 눈도 날이 갈수록 예전 같지 않다. 기계도

사람도 내구 시효라는게 있는데 왜 이리 자신을 혹사하는 것 일까? 최근의 장작활동만 보더라도 짧게는 10년, 길게는 15년을 불철주야 신들린 사람처럼 이리 미쳐서 산다. 그것이 나만의 응어리진 한풀이는 아닐까? 그렇다손 치더라도 무당은 신이라도 내리지, 나는 잡신도 내리지 않은 말짱한 정신으로 도대체 무엇을 위하여 이토록  피를 말리고 제 살을 깎아먹고 살았을까?

훠이훠이 남녘으로 기러기 떼 줄지어 날아가도, 춘 삼윌 개나리 온 산에 만발하여도 내게는 모두 상상 속에 존재하는 살아있는 것들일 뿐, 사시사철 정작 마음을 주지도 받지도 못 하였다. 내가 나를 가두고 '프리즘'을 통하여 빛을 펼쳐보는 작은 움직임만 허용한 세월, 그곳에 나는 4만 시간이 훨씬 넘는 길고도 긴 자신과의 다툼 속에 피를 토하는 어미새처럼 발을 동동 굴리고 까만 가슴을 태웠다. 적어도 그러한 아픔이 없었다면 무슨 그럼이 되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