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비디아 로봇용 컴퓨터에 128GB LPDDR5X 탑재…전력 효율이 경쟁력
인공지능(AI) 데이터센터를 중심으로 성장해온 메모리 반도체 시장에 새로운 수요처가 등장하고 있다. 사람처럼 움직이며 주변 환경을 인식하고 판단하는 '휴머노이드 로봇'이다.
AI 서버가 고대역폭메모리(HBM) 시장을 키웠다면 휴머노이드 로봇은 저전력·고용량 D램의 새로운 응용처가 될 가능성이 있다. 로봇에 탑재되는 AI 모델이 고도화될수록 실시간으로 처리해야 할 데이터가 늘어나면서 연산장치뿐 아니라 메모리 성능과 용량의 중요성도 커지기 때문이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국내 메모리 업체 입장에서도 새로운 시장이 열리는 셈이다.
D램 수요 4년 만에 20배…한 대당 탑재량도 두 배
시장조사업체 카운터포인트리서치에 따르면 휴머노이드 로봇의 연산장치에 사용되는 D램 수요는 2026년 약 8300테라비트(Tbit)에서 2030년 약 17만2000Tbit로 증가할 전망이다.
4년 만에 약 20.7배로 확대되는 규모다.
같은 기간 휴머노이드 한 대에 탑재되는 평균 D램 용량도 19GB에서 39GB로 늘어날 것으로 예상됐다. 약 105% 증가하는 수준이다.
휴머노이드 시장에서는 로봇 판매량 증가와 함께 개별 제품에 들어가는 메모리 용량까지 동시에 커지는 구조가 나타날 수 있다는 의미다.
2030년 예상 수요인 17만2000Tbit를 저장 용량으로 환산하면 약 21.5페타바이트(PB)다. 다만 실제 시장 규모는 휴머노이드 판매 대수와 제품별 메모리 탑재량뿐 아니라 D램 가격과 제품 구성 등에 따라 달라진다.
이런 가운데, 휴머노이드가 중요한 이유는 AI 반도체의 사용처가 데이터센터에서 현실 세계의 기기로 확장되고 있다는 데 있다.
기존 산업용 로봇이 정해진 동작을 반복하는 방식이었다면 차세대 휴머노이드는 카메라와 센서로 주변 정보를 받아들이고 이를 분석해 행동을 결정해야 한다.
시각과 언어, 행동 정보를 동시에 처리하는 AI 모델이 로봇에 적용될수록 연산장치가 처리해야 할 데이터가 늘어난다. 그만큼 데이터를 저장하고 빠르게 공급하는 메모리의 역할도 커진다.
HBM과 다른 로봇용 메모리…왜 LPDDR인가
AI 데이터센터의 핵심 메모리가 HBM이라면 로봇에서는 다른 조건이 중요해진다.
HBM은 여러 개의 D램을 수직으로 쌓아 데이터 전송 대역폭을 크게 높인 제품이다. 대규모 AI 연산을 담당하는 GPU와 AI 가속기 등에 주로 사용된다.
반면 휴머노이드는 높은 연산 성능을 확보하는 동시에 전력 소비도 줄여야 한다. 데이터센터 서버와 달리 로봇은 배터리를 이용해 움직이기 때문이다. 연산장치와 메모리의 전력 소비가 늘어나면 배터리 사용 시간이 줄고 발열 관리 부담도 커진다.
이 때문에 휴머노이드와 같은 배터리 기반 기기에서는 저전력 D램인 LPDDR이 중요한 역할을 할 가능성이 있다.
LPDDR은 스마트폰과 노트북 등에서 발전해온 메모리로, 일반 D램보다 전력 소비를 낮추는 데 초점을 맞춘 제품이다.
실제 엔비디아가 2025년 8월 상용화한 로봇용 컴퓨팅 플랫폼 ‘젯슨 AGX 토르(Jetson AGX Thor)’의 고성능 모듈에는 128GB LPDDR5X 메모리가 탑재됐다.
엔비디아가 공개한 사양에 따르면 해당 제품의 메모리 대역폭은 초당 273GB다.
엔비디아는 젯슨 토르가 이전 세대인 젯슨 오린 대비 AI 연산 성능은 최대 7.5배, 에너지 효율은 최대 3.5배 개선됐다고 설명했다.
로봇용 고성능 컴퓨터에서 단순히 연산 속도만 높이는 것이 아니라 전력 효율을 동시에 확보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을 보여주는 사례다.
삼성전자·SK하이닉스에 열리는 새 시장…관건은 저전력 메모리
휴머노이드 시장 확대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국내 메모리 업체에도 새로운 수요처가 생긴다는 의미가 있다.
두 회사는 스마트폰과 PC, 데이터센터 등 다양한 분야에 D램을 공급해왔으며 저전력 메모리인 LPDDR 제품군도 보유하고 있다.
휴머노이드의 연산 성능이 높아지고 로봇 내부에서 처리해야 하는 데이터가 늘어나면 고용량·저전력 메모리에 대한 수요 역시 증가할 가능성이 있다.
특히 로봇은 제한된 배터리로 장시간 작동해야 하기 때문에 단순히 높은 연산 성능을 제공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전력 소비와 발열을 줄이는 기술도 중요하다.
이에 따라 모바일 기기에서 발전해온 LPDDR 기술이 로봇용 컴퓨팅으로 활용 영역을 넓힐 가능성이 주목된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입장에서는 기존 모바일·AI 메모리 기술을 활용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응용 시장이 열리는 셈이다.
향후 관건은 휴머노이드 출하량뿐 아니라 로봇 한 대에 탑재되는 메모리 용량, 고성능·고부가가치 제품의 비중이 얼마나 높아지는지가 될 전망이다.
로봇을 많이 만든다고 끝 아니다…상용화가 최대 변수
메모리 수요 전망의 가장 큰 변수는 휴머노이드 산업이 실제 상용화 단계에 얼마나 빨리 진입하느냐다.
글로벌 기업들이 잇따라 휴머노이드 개발과 생산능력 확대에 나서고 있지만 실제 산업 현장에서 사람의 작업을 안정적으로 대체하기까지는 해결해야 할 과제가 많다.
하드웨어를 생산하는 것과 다양한 환경에서 자율적으로 작업할 수 있는 로봇을 만드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휴머노이드가 공장이나 물류 현장에 본격 투입되려면 주변 환경을 인식하고 작업을 수행하는 능력뿐 아니라 안전성과 유지보수 비용, 실제 생산성 등을 입증해야 한다.
로봇의 ‘몸’을 대량 생산할 수 있더라도 이를 움직이는 AI가 충분한 수준에 도달하지 못하면 시장 확대 속도는 제한될 수 있다.
이는 메모리 업체에도 그대로 영향을 준다. 로봇 한 대에 들어가는 메모리 용량이 늘어나더라도 휴머노이드 판매량 자체가 기대에 미치지 못하면 전체 D램 수요 증가폭도 제한될 수밖에 없다.
반대로 휴머노이드가 산업 현장에서 경제성을 입증하고 대량 보급 단계로 넘어간다면 메모리 시장은 ‘로봇 판매량 증가’와 ‘대당 메모리 탑재량 증가’라는 두 가지 성장 동력을 동시에 확보할 수 있다.
HBM 다음 성장동력 될까…결국 중요한 것은 수익성
로봇용 D램 시장의 성장 가능성은 높지만 HBM에 이어 메모리 업계의 핵심 수익원으로 자리 잡을지는 아직 판단하기 이르다.
우선 휴머노이드의 실제 출하량이 지속적으로 증가해야 한다. 동시에 로봇 한 대에 필요한 메모리의 용량과 성능도 높아져야 한다.
휴머노이드 제조사들이 제품 가격을 낮추기 위한 경쟁에 나설 경우 메모리 공급업체에도 원가 절감 압력이 가해질 수 있다. 로봇용 메모리가 기존 모바일·PC용 제품과 얼마나 차별화되고 높은 부가가치를 확보할 수 있는지도 중요하다.
HBM은 AI 가속기의 연산 성능을 뒷받침하는 핵심 부품으로 자리 잡으며 높은 기술 난도와 제한된 공급 능력을 바탕으로 메모리 기업들의 주요 수익원으로 성장했다.
반면 로봇용 메모리는 아직 제품별 요구 사양과 공급 구조가 형성되는 단계다.
LPDDR 수요가 크게 늘더라도 제품 가격이나 수익성이 낮다면 출하량 증가가 기업 실적에 미치는 영향은 제한될 수 있다. 따라서 로봇 시장이 HBM에 이은 새로운 성장동력이 될지를 판단하려면 단순한 수요 증가율보다 실제 출하량과 제품 가격, 메모리 업체들의 수익성을 함께 살펴봐야 한다.
한편 AI 반도체 수요가 대형 데이터센터에 집중됐던 단계에서 벗어나 로봇과 자율주행차, 산업용 장비 등 현실 세계에서 작동하는 다양한 기기로 확산되고 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에는 HBM 중심의 AI 메모리 성장에 이어 저전력·고용량 D램의 새로운 고객군을 확보할 가능성이 생기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