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삼 서거] 민주화의 아버지…금융실명제 등 숱한 업적 남기고 떠난 대통령
[김영삼 서거] 민주화의 아버지…금융실명제 등 숱한 업적 남기고 떠난 대통령
  • 이성진 기자
  • 승인 2015.11.23 1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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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년 88세로 서거한 김영삼 전 대통령, 여야를 넘나드는 활약…숱한 업적 남겨
▲ 23일 국회 본청 앞에 마련된 김영삼 전 대통령의 분향소

대한민국의 민주화를 일구어낸 김영삼 전 대통령이 지난 19일 고열과 호흡곤란 증상으로 입원했지만 호전되지 못하고 22일 오전 12시 22분 패혈증과 급성심부전증으로 인해 향년 88세로 서울대 병원에서 서거했다.

23일부터 전국 곳곳에 김 전 대통령의 분향소가 마련된 가운데 국회의사당 본청 앞 분향소에도 국회의원을 비롯한 국회 직원·시민들의 조문 행렬이 끊이지 않고 있다.

1993년 14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그는 '문민(文民)정부'를 이끌며 민주화된 대한민국을 상징하게 됐다.

'최연소 당선'·'9선 의원'
3당통합, 민주화 바람 일으켜

1954년 26세의 나이로 3대 민의원 선거에 당선된 김 전 대통령은 '최연소 당선' 타이틀을 차지하며 14대 국회까지 총 9선 의원을 지냈다. 이 기록들은 아직까지도 깨지지 않고 있다.

이후 김 전 대통령은 동료의원 10여명을 규합해 자유당을 탈당하고 1955년 야당인 민주당 창당에 합류했다. 1960년 4·19 혁명과 민주당 장면 정부 수립으로 여당 의원이 되기도 했지만 박정희 정권이 수립되면서 민주화의 기수로 거듭났다.

1971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40대 기수론'을 내세우기도 한 그는 당내 경선에서 '라이벌'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패했지만 야권 지도자로서 자리매김하면서 1974년 신민주공화당 총재에 선출돼 '선명 야당'을 앞세워 반독재 투쟁의 선봉에 섰다.

유신 말기에 국회의원에서 제명되자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오고야 만다"는 명언을 남기기도 한 그는 헌정사상 최초로 의원직 제명까지 이어졌지만 "호랑이를 잡으러 호랑이굴에 들어간다"는 명분을 앞세워 1990년 당시 노태우 대통령의 민주정의당, 김종필 총재의 신민주공화당의 합당을 이루며 민주자유당을 창당했다.

이후 1992년 제14대 대통령 선거에서 라이벌 김대중 전 대통령과 정주영 후보와의 3파전에서 승리하며 문민정권을 일궈냈다.

▲ 1983년 8월 13일 민주화를 요구하는 김영삼 전 대통령의 기자회견 모습 ⓒ 뉴시스
대대적 개혁 드라이브
길이 남을 업적 '금융실명제'

김 전 대통령은 취임하자마자 ▲금융실명제 ▲교육개혁 ▲지방자치제도 도입 등을 통해 국가시스템을 차근차근 고쳐나갔다.

이 중에서도 특히 금융실명제는 길이 남을 업적으로 평가받고 있다. 금융실명제는 모든 금융거래를 금융거래 당사자 실제 본인의 이름으로 하도록 도입한 제도로, 지금에야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지만 당시만 하더라도 그렇지 않았다.

돈의 흐름을 투명하게 만들어 부정부패를 막고 공정하게 과세를 하는, 이른바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기본원칙을 수립하기 위해 1993년 8월 '긴급재정경제 명령 제16호'로 금융실명제를 전격 실시했다.

이에 1급이상 공직자의 재산을 공개하도록 하면서 임기 중반인 1995년 노태우 전 대통령 비자금을 세상에 드러냈고 곧이어 전두환 전 대통령 비자금 사건으로 이어가면서 전직 대통령 두 명을 '역사 바로 세우기'라는 명분으로 구속시켰다.

또한 김 전 대통령은 취임 9일만에 육군참모총장과 기무사령관 등 군부의 핵심인 사조직 '하나회'를 축출하는 인사를 단행해, 40년 가까이 이어져온 군부정권의 정치 참여를 종식시키고 향후 부활의 가능성도 제거하는 민주화를 이뤄냈다.
 
이 외에도 1996년 조선총독부 건물 철거와 선진국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시키는 업적 또한 남겼다.

하지만 기아차 사태 등 대기업 연쇄 부도가 결국 외환위기로 이어져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하는 오점을 남기기도 했다.

(데일리팝=이성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