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랜드 이거 아니?] 고정관념 탈피 패션계의 새로운 역사를 쓴 '입생로랑'
[브랜드 이거 아니?] 고정관념 탈피 패션계의 새로운 역사를 쓴 '입생로랑'
  • 이지원
  • 승인 2019.09.20 1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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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대 부터 1960년대, 여성의 '미(美)'를 강조하며 여성의 복장에 대한 규제가 심했던 시절이 있다.

여성에게는 정장 바지조차 허락되지 않았으며, 공공장소에서도 바지를 입는 것은 금물이었다. 대부분의 여성들은 '여성미가 강조된' 치마를 입어야만 했다.

하지만 이러한 고정관념을 용기있게 깬 디자이너가 있다. 

관습과 규제에 억압돼 있던 여성들에게 치마와 바지 등 옷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선사했으며, 턱시도를 입은 여성 모델을 자신의 런웨이에 실제로 세우기도 했다. 또한 작품성 높은 옷들을 상대로 별도의 쇼를 진행하는 자신의 '오트 쿠튀르' 무대에서 최초로 흑인을 모델로 세워 '패션계의 새로운 역사를 쓴' 디자이너로 평가되기도 한다.

혁신적이고 도전적이며, 사회의 시선에도 굴하지 않고 평등을 주장했던 디자이너 이브 생 로랑(Yves Saint Laurent)을 소개한다.

혁신적이고 도전적이며, 사회의 시선에도 굴하지 않고 평등을 주장했던 디자이너 이브 생 로랑 (사진=입생로랑 뷰티 공식 홈페이지에서 캡처)

옷에 대한 그의 관심은 아주 어린 시절부터 시작됐다. 

여동생들을 위해 종이로 만든 인형옷을 만들었던 그의 관심은 19세에 파리 최대 오트 쿠튀르 하우스인 '크리스찬 디올'의 조수로 패션계에 입문할 때까지 계속됐다.

이브 생 로랑이 디올의 조수로 자리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크리스찬 디올은 숨을 거뒀으며, 수재였던 그는 2년 만인 1957년 21세의 젊은 나이에 크리스찬 디올의 수석 디자이너로 자리하게 됐다.

혁신적이고 도전적이었으며, 예술적이었던 그의 감각은 그를 수석 디자이너에 앉을 수 있게 만들었지만 당시 크리스찬 디올 대다수의 고객층은 보수적인 중년층으로 이루어져 있었기에 지나치게 혁신적이던 디자인에 대해 상당한 혹평을 받기도 했다. 따라서 이브 생 로랑은 결국 디올의 수석 디자이너 자리에서 내려오게 됐다.

이브 생 로랑은 규제가 심했던 여성의 패션에 반기를 들며 최초로 여성이 입는 정장 바지를 선보였다. (사진=생로랑 인스타그램에서 캡처)

어린 시절 겪었던 학교 폭력으로 인한 후유증으로 조울증을 앓고 있던 그의 마음은 연약하기만 했다.

우울증과 약물 중독, 알코올 중독 등 방황을 이어가던 이브 생 로랑은 정신과 의사이자 자신의 연인이 된 피에르 베르제를 만나 정신병원에서 패션계로 돌아올 수 있었다. 결국 1961년, 훗날 입생로랑의 전신이 될 '이브 생 로랑 쿠튀르 하우스(Yves Saint Laurent Couture House)'를 설립할 수 있었다.

자신의 독자적인 브랜드와 함께 컬렉션을 내보이기 시작한 이브 생 로랑은 곧 파리 패션계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기 시작했다. 이브 생 로랑은 향후 패션계의 주 고객층은 보수적인 중년층이 아닌 혁신을 따르는 젊은이들로 변화할 것이라 예측했으며, 이를 바탕으로 당시 젊은층이 관심을 가질 만한 파격적인 디자인들을 선보였다.

전통적이고 우아한 스타일에 젊은 감각을 가미한 이브 생 로랑은 극찬을 받았으며, 이에 프랑스인들은 이브 생 로랑은 '파리 오트 쿠튀르의 황태자'라 칭하거나 "파리 오트 쿠튀르의 구원자가 등장했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특히 그는 사회의 흐름을 읽고 그에 맞는 새로운 패션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많은 이들의 지지를 얻었다.

스트리트 패션을 사랑했던 그는 '기성복 라인(Ready-to-Wear)'을 런칭하기도 했으며, 여성들의 여성 인권 신장 운동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이브 생 로랑은 자신의 컬렉션인 '르 스모킹(le smoking: 턱시도)'에서 여성에게 최초로 정장바지를 입혀 쇼를 진행했다. 당시 정장과 트렌치코트는 남성들을 위한 옷이었지만, 입생로랑의 과감한 감각으로 인해 먼 훗날의 여성들도 정장 바지는 물론 트렌치코트를 입을 수 있게 됐다.

또한 여전히 여성들에게 복장 규제의 잣대가 엄격하게 들이밀어지던 시대에도 이브 생 로랑의 과감한 행보는 계속됐다.

당시 페미니스트들이 여성의 인권 신장 운동에서 '브래지어를 벗고 태우자'고 주장하던 시위에 이브 생 로랑은 여성들의 생각을 받아들여 1968년, '시스루 룩'을 발표하기도 했다.

이러한 이브 생 로랑은 오늘날 여성의 패션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것은 물론, 여성을 '코르셋'에서 해방시키는 것은 물론 자유와 사회적인 활동을 도울 수 있었다는 점에서 현재까지도 큰 의미로 부각되고 있다.

에디 슬리먼은 입생로랑의 새로운 길을 열었다. (사진=생로랑 공식 홈페이지에서 캡처)

천재적인 감각으로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았던 이브 생 로랑 2008년 숨을 거뒀다. 이브 생 로랑의 타계 이후 입생로랑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다리에는 다른 이가 올라야 했으며 2012년, 디올 옴므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였던 에디 슬리먼(Hedi Slimane)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같은 해 에디 슬리먼은 입생로랑의 브랜드명을 '생 로랑(Saint Laurent)'으로 변경했다. 과거 이브 생 로랑이 최초로 발표했던 여성 기성복 라인 '생 로랑 리브 고쉬(Saint Laurent rive gauche)'을 발표하며 여성에게 자유를 선사했던 것과 동시에 사회 참여적이었던 당시의 시대 정신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의미였다.

이후 에디 슬리먼은 브랜드명 뿐만 아니라 ▲스토어 컨셉 ▲비주얼 컨셉 ▲캠페인 광고에까지 직접적으로 참여했다. 디올옴므의 스키니 룩으로 많은 남성들의 다이어트 욕구를 불러일으켰던 에디 슬리먼은 정체됐던 입생로랑 정장 브랜드의 이미지를 터프하게 바꾸기도 했다.

이렇듯 생 로랑을 적극적으로 리브랜딩한 에디 슬리먼은 생 로랑의 매출을 빠르게 끌어올렸다. 에디 슬리먼은 특유의 '록 스피릿' 감성을 1960년대 입생로랑의 우아한 룩과 조화롭게 섞어 브랜드의 역사를 다시 썼다는 평가를 받고 있으며, 실제로 2015년 생 로랑의 4분기 매출은 전년도 동분기에 비해 27% 이상 상승한 것으로 나타났다.

브랜드 창립자였던 이브 생 로랑의 명성에 맞먹는 자신만의 생 로랑을 만들 수 있었던 것이다.

입생로랑은 이제 뷰티 브랜드로서도 그 명성을 떨치고 있다. (사진=입생로랑 뷰티 인스타그램에서 캡처)

패션 브랜드로 이름을 알렸던 입생로랑은 이제 코스메틱 브랜드로도 그 명성을 떨치고 있다.

전 세계의 많은 여성들이 사랑하는 코스메틱 브랜드로 성장한 입생로랑 뷰티는 면세점에서 가장 잘 팔리는 제품 중 하나로 손꼽히기도 한다.

매 시즌마다 특별한 한정판과 어디서도 볼 수 없었던 질감, 여심을 사로잡는 화려한 케이스와 색감은 입생로랑을 패션과 뷰티 어느 하나에서도 빠질 수 없게끔 만들었다.


(데일리팝=이지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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