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매 걸리면 내 돈 어디로”...초고령 한국, 믿을 ‘신탁’이 없다 
“치매 걸리면 내 돈 어디로”...초고령 한국, 믿을 ‘신탁’이 없다 
  • 김다솜
  • 승인 2025.12.26 1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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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硏 ‘신탁업 활성화를 위한 법적 방안’ 보고서
日, ‘후견제도지원신탁’ 등 고령층 안전판 마련..시장규모 GDP 3배
한국, 낡은 규제에 묶여 ‘종합 자산관리’ 불능
ⓒgettyimagesba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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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이 2024년 말 65세 이상 인구 비중 20%를 넘어서는 초고령사회에 진입하면서 ‘자산의 안전한 노후 관리’가 발등의 불로 떨어졌다. 치매나 고령으로 인한 자산 탈취를 막고 안전한 상속을 돕는 ‘신탁’이 거의 유일한 해법으로 꼽히지만 정작 한국의 신탁 제도는 낡은 규제에 묶여 제구실을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한국금융연구원이 최근 발간한 ‘신탁업 활성화를 위한 법적 방안 - 일본 사례를 중심으로’ 보고서는 이같은 경고와 함께 20년 앞서 제도를 정비한 일본의 사례를 벤치마킹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보고서에 따르면 고령화에 맞춰 일찌감치 신탁제도를 뜯어고친 일본의 신탁 시장 규모(수탁고)는 2024년 12월 말 기준 약 1767조엔(약 1경6000조엔)에 달한다. 이는 일본 국내총생산(GDP)의 290%에 육박하는 수치다. 반면 한국은 1378조원으로 GDP 대비 54%에 불과하다. 절대 금액으로 따지면 일본 시장이 한국보다 11.8배가량 크다. 

이같은 격차의 원인으로는 ‘법제’가 꼽힌다. 일본은 2000년대 초반 신탁업법과 신탁법을 대폭 개정해 재산 종류 제한을 없애는 포괄주의를 선택하고, 재신탁을 허용하는 등 규제를 과감히 풀었다. 덕분에 고령층의 자산을 종합적으로 관리해 주는 포괄신탁이 전체 시장의 58%를 차지할 만큼 성장했다. 

 

“치매노인 돈, 법원이 지킨다”
일본의 후견지원신탁 VS 한국의 현실 

보고서는 특히 치매 등 고령자를 위한 안전장치에서 양국의 차이가 크다고 지적했다. 일본은 2012년 도입한 ‘후견제도지원신탁’이 활발히 운영되고 있다. 이는 치매 노인 등의 피후견인의 재산을 신탁은행에 맡겨두고 생활비 등 필요한 돈만 정기적으로 지급받는 구조다. 

목돈을 인출하거나 계약을 해지하려면 가정재판소의 지시서가 있어야 하므로 친족 등 후견인에 의한 재산 횡령을 원천 차단한다. 한국도 유사한 후견신탁 상품이 있지만 일본처럼 법원이 사전 지시서를 통해 인출을 통제하는 등의 강력한 감독체계는 갖추지 못했다. 

한국 신탁이 ‘믿을 구석’이 되지 못하는 또 다른 이유는 맡길 수 있는 재산이 한정적이라는 점이다. 한국 자본시장법은 금전, 부동산, 증권 등 법에 나열된 7가지 재산만 수탁할 수 있는 ‘열거주의’를 고수한다. 이 때문에 최근 자산으로 인정받는 가상자산이나 지식재산권(IP) 등은 신탁 자체가 불가하다. 

반면 일본은 ‘안 되는 것 빼고 다 되는’ 포괄주의 방식으로 규제를 전환했다. 일본 신탁은행들은 가상자산 수탁 업무는 물론 공유 자전거 사업이나 태양광 발전 사업 자체를 신탁받아 운용하는 등 다양한 혁신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고령층 자산관리의 핵심인 ‘원스톱 서비스’도 한국에선 요원하다. 은행이 고객의 재산을 통째로 맡아 관리하려 해도 부동산 관리 등 전문성이 필요한 업무를 다른 회사에 다시 맡기는 ‘재신탁’이 사실상 불가능해서다. 자본시장법에 명시적 근거가 없다는 이유로 금융당국은 보수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이 때문에 고객이 예금과 부동산, 주식을 한 번에 맡기고 싶어도 은행이 이를 감당하지 못해 종합 자산관리가 이뤄지지 못하고 있다. 

보고서는 “일본은 재신탁 허용 이후 자산관리 전문 신탁은행이 등장하며 시장이 폭발적으로 성장했다”며 “한국도 자본시장법 개정을 통해 재신탁을 허용해야 고령층의 종합 자산관리 수요를 감당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한국 신탁법은 이미 2012년에 전면 개정돼 유연성을 갖췄지만 이를 규제하는 자본시장법이 변화를 따라가지 못해 괴리가 크다”며 “초고령사회 국민의 노후 자산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신탁업 규제를 원점에서 재검토해야 할 시점”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