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5년 사이 신용점수 900점 이상 고신용자가 급증하면서 신용평가 시스템의 '신뢰성'이 흔들리고 있다. 28.6%에 달하는 소비자가 950점 이상을 받고 있지만, 정작 금융 현장에서는 점수만으로 리스크를 제대로 구분하기 어렵다는 지적이 나온다. 금융당국이 개인신용평가체계 전면 재검토에 나선 배경이다.
지난 20일 금융위원회가 개최한 '신용평가체계 개편 TF' 킥오프 회의에서 코리아크레딧뷰로(KCB)는 현행 개인신용평가 시스템의 문제점을 진단하며, 평가기준 조정과 모형 재개발 검토가 필요한 시점이라고 제언했다.
5년 만에 900점대 8%p 급증…"점수 쏠림 심각"
KCB 연구소에 따르면, 2019년부터 2024년까지 5년간 신용평점 900점 이상 고신용자 비중이 36.3%에서 44.3%로 8%포인트 증가했다. 특히 950~1000점 구간에는 전체 평가대상의 28.6%인 1,436만 명이 몰려 있다.
이는 2018년 2월 전체 평가대상의 16.9%에 불과했던 것과 비교하면 약 7년 만에 11.7%포인트 증가한 수치다. 900~949점 구간도 2024년 말 기준 16.1%를 차지하고 있다.
KCB 연구소 관계자는 "거시적 금융환경의 변화, 신용관리에 따른 가점 대상자 증가, 연체정보 공유 제한 등 복합적 영향으로 개인신용평점 상위점수 구성비가 크게 증가했다"며 "개인신용평가의 신뢰성 확보를 위한 평가기준 조정, 평가모형 재개발 검토가 필요한 시점"이라고 진단했다.
점수 인플레이션 배경은?
신용점수 인플레이션의 배경에는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우선 개인신용평가에 대한 소비자들의 관심이 높아지면서 적극적인 신용관리가 이뤄졌다. 신용점수 관리 앱과 서비스가 확대되며 연체 없이 금융거래를 유지하는 소비자가 늘었다.
여기에 코로나19 이후 정부가 시행한 신용회복 지원, 연체정보 공유 제한 등의 정책도 전반적인 신용점수 상승에 영향을 미쳤다. 2020년 신용등급제에서 신용점수제로 전환되면서 기존 등급 구간 내 상위 점수를 받던 소비자들의 점수가 일제히 상승한 효과도 있다.
금융업계에서는 과거 등급제에서는 같은 등급 내 미세한 차이가 드러나지 않았지만, 점수제로 전환되면서 상위 구간으로 올라간 소비자들이 많아진 것도 인플레이션의 한 원인으로 분석하고 있다.
금융 현장선 "변별력 떨어진다" 불만
문제는 신용점수의 '변별력' 저하다. 금융회사들은 신용점수만으로는 대출 승인 여부나 금리를 결정하기 어렵다는 입장이다. 900점대가 전체의 절반 가까이를 차지하면서, 같은 고신용자 구간 내에서도 실제 상환능력 차이가 크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특히 제2금융권의 경우 신용점수에 크게 의존하는 표준 신용평점시스템(CSS)을 사용하는데, 점수 구분력이 떨어지면서 실제 리스크 관리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지적이다.
금융업계에서는 신용점수 상위 구간 비중이 지나치게 높아지면 평가모형의 예측력이 약화된다고 우려한다. 금융회사 입장에서는 점수를 신뢰하기 어렵고, 소비자 입장에서는 높은 점수에도 불구하고 대출이 거절되는 상황이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Thin-filer에겐 710점…"금융이력 없으면 중신용 취급"
한편 KCB는 금융거래정보가 부족한 신용거래정보부족자(Thin-filer) 문제도 지적했다. 2024년 말 기준 Thin-filer는 1,239만 명(전체 평가대상의 24.6%)에 달하는데, 이들에게 평균 710점 수준의 신용점수가 부여되고 있다.
Thin-filer는 노년층(31.3%), 청년(26.8%), 주부(21.9%), 외국인(10.0%) 순으로 구성된다. 이들은 최근 신용거래를 하지 않았거나, 처음 금융생활을 시작하는 경우가 많아 평가에 활용할 금융정보가 부족하다.
최척 부장은 "3년 이내 신용카드 또는 대출 상환 실적이 없어 정확한 평가에 한계가 있으며, 다른 정보들을 활용하여 평균 710점 수준의 신용점수가 부여되고 있다"며 "이들을 포용할 수 있는 평가체계 개선이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실제로 성실하게 생활하지만 금융거래를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중신용(700~749점) 구간으로 평가받는 것은 불합리하다는 지적이 많다. 특히 현금 위주로 생활하거나, 부모 재산으로 생활하는 청년층, 배우자 소득으로 생활하는 주부 등이 대표적이다. 소비자단체들은 통신요금, 공과금, 임대료 등 비금융정보를 적극 활용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평가모형 재개발 vs 비금융정보 확대…두 갈래 해법
금융당국과 업계는 신용평가 신뢰성 회복을 위한 두 가지 방향을 검토 중이다.
첫째는 CB사의 평가모형 자체를 재개발하는 것이다. 금융환경 변화를 충분히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는 판단에서다. 평가 기준을 조정해 상위 구간 쏠림을 완화하고, 구간별 변별력을 높이는 방안이 논의된다.
둘째는 비금융정보 활용 확대다. 특히 Thin-filer들의 금융접근성을 높이기 위해 통신요금, 공과금, 국민연금, 건강보험료 납부 실적 등을 신용평가에 반영하는 방안이다. 현재도 제한적으로 활용되고 있지만, 데이터 분석의 한계와 정보 제공기관의 협조 문제로 확대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KCB는 "비금융정보의 발굴과 활용에 애로사항이 있다"며 "데이터 분석 기술 고도화와 함께 정보 제공기관과의 협력 체계 구축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신뢰성·공정성 동시 확보해야"
권대영 금융위 부위원장은 이날 모두발언에서 "경제환경 변화, 해외사례 등을 감안해 기존 CB사의 개인신용평가 기준·방식의 신뢰성 및 공정성에 대한 전반적 평가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개인신용평가모형의 변별력·안정성을 유지하면서 사회·구조변화에 따른 개인의 다양한 리스크를 반영할 수 있도록 신용평가체계 고도화를 지원하겠다"며 "소비자의 일상생활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정보가 신용평가에 공정하게 반영될 수 있도록 하여 중·저신용자의 금융 접근성을 제고하겠다"고 밝혔다.
금융위원회는 앞으로 TF를 속도감 있게 운영하여 개인신용평가체계 개편 방안을 마련하고, 세부 추진방안이 확정되는 대로 발표할 계획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