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세 10년, 신용점수 0점의 역설
매달 50만원씩 월세를 10년간 연체 없이 납부한 1인가구가 있다. 총 6000만원을 성실히 지급했지만, 이 사람의 신용점수는 그 사실을 반영하지 않는다.
반면 주택담보대출로 같은 금액을 상환한 사람은 '우량 신용거래자'로 평가받는다. 같은 금액, 같은 성실성인데 한쪽은 신용이 되고 한쪽은 되지 않는다.
2024년 1인가구는 전체 가구의 36.1%를 차지하나, 이들의 주택 소유율은 31.3%에 불과하다.
나머지 약 540만 가구는 전월세로 거주하고 있다. 1인가구의 월평균 소비지출 163만원 중 주거·수도·광열비가 18.2%를 차지하는데, 이는 연간 약 360만원이 주거비로 나간다는 뜻이다.
10년이면 3600만원, 20년이면 7200만원이다. 그러나 이 막대한 금액의 성실한 납부 이력은 현행 신용평가 시스템에서 거의 인정받지 못한다.
'자산 보유'가 '상환 능력'을 대체한다
신용점수는 상환 이력, 부채 수준, 신용거래 형태, 신용거래 기간의 4가지 기준으로 평가된다. 문제는 이 '상환 이력'이 금융거래 이력만을 의미한다는 점이다. 은행 대출, 신용카드, 할부금 상환은 신용으로 인정되지만, 월세·공과금·통신비 납부는 자동으로 반영되지 않는다.
공공요금(도시가스, 수도, 전기 등), 통신요금, 국민연금, 건강보험료 납부내역 등의 비금융정보를 인터넷을 통해 개인신용평가회사에 직접 등록하면 신용점수에 플러스 요인이 될 수 있다고 하지만, 이는 자발적으로 제출해야 하는 부가 항목일 뿐이다.
더 큰 문제는 월세 납부 이력이다. 월세는 공과금처럼 간편하게 등록할 수 있는 시스템조차 없다. 임대차계약서와 계좌이체 내역을 일일이 증빙해야 하며, 그마저도 신용평가에서 핵심이 아닌 '참고' 수준으로만 반영된다.
월세 10년 납부가 주택담보대출 2년 상환보다 낮게 평가되는 시스템은 공정하지 않다는 지적도 나온다.
담보가 있으면 신용, 없으면 위험
2024년 가계금융복지조사에 따르면 전체 가구의 평균 자산은 5억4022만원인 반면, 1인가구의 평균 자산은 2억1217만원에 불과하다. 자산 격차는 2.5배지만, 금융 접근성 격차는 그 이상이다.
현행 신용평가 시스템은 '자산 보유 여부'를 핵심 지표로 삼는다. 주택을 소유하면 높은 신용등급을 받고, 그 주택을 담보로 낮은 금리의 대출을 받는다. 반면 무주택자는 담보가 없어 구조적으로 낮은 등급에 머물고, 높은 금리의 신용대출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역설적이게도, 월 50만원 월세를 10년간 납부한 사람(총 6000만원)보다 5000만원짜리 주택담보대출을 2년간 상환한 사람이 더 높은 신용점수를 받는다. 전자는 '소비'로 분류되고, 후자는 '상환 이력'으로 평가되기 때문이다.
이는 신용평가가 '미래 상환능력'이 아니라 '현재 자산 보유'를 더 중시한다는 증거다. 월세를 10년간 연체 없이 납부한 사람은 명백히 지급능력이 있지만, 담보가 없다는 이유로 '신용 위험군'으로 분류된다.
담보 중심 평가는 1950~1980년대 고도성장기 한국 금융의 유산이다. 부동산 가치가 지속적으로 상승하던 시대, 주택 소유가 곧 신용이었다. 그러나 1인가구가 36% 이상에, 그 중 70% 가까이가 무주택자인 사회에서, 이 평가 기준은 변화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사용되지 않는 월세 납부 데이터
월세 납부 데이터는 존재한다. 임대인의 계좌에는 매달 입금 기록이 남고, 임차인의 계좌에는 출금 기록이 남는다. 국세청은 연말정산을 위해 월세 납부 증빙을 요구하고, 지자체는 주거급여 심사를 위해 임대차계약서를 확인한다.
데이터는 있다. 그러나 이 데이터를 신용평가에 자동으로 연계하는 시스템은 없다. 토스와 카카오톡 등에서 휴대폰 요금, 건강보험, 국민연금 납부 내역을 제출하여 신용도를 올릴 수 있는 기능을 제공하지만, 월세는 누락되어 있다.
일부 카드사는 '월세 카드 납부' 서비스를 제공한다. 신한카드의 'My월세' 서비스는 주택 및 상가의 임대료를 신용카드로 납부하는 서비스지만, 카드 결제는 신용거래로 인정되어도 월세 납부 자체가 신용점수에 직접 반영되는 것은 아니다. 카드 사용 실적만 인정될 뿐, '월세를 성실히 냈다'는 사실은 평가 요소가 아니다.
신용이 없으면 신용을 쌓을 수 없다
2023년 10월 기준 취업자 1인가구 467만 5천 가구 중 단순노무종사자가 15.2%를 차지한다. 프리랜서, 플랫폼 노동자, 자영업자 등 불안정 고용 형태가 많다. 이들은 소득 증빙이 어렵고, 금융거래 이력도 부족하다.
NICE는 체크카드를 6개월 이상 매월 30만원 이상 사용할 경우 최대 40점의 가점을 부여하지만, 월세 50만원을 10년간 납부한 이력보다 체크카드 사용 실적이 더 높은 평가를 받는 구조다.
금융이력이 없으면 신용점수가 낮고, 신용점수가 낮으면 금융거래가 어렵다. 금융거래가 없으면 신용 이력을 쌓을 수 없고, 이력이 없으면 다시 저신용자로 남는다. 악순환의 고리다.
금융위원회는 2024년 4월 '마이데이터 2.0 추진 방안'을 발표하며, 통신요금 납부·공공요금 결제·플랫폼 거래내역 등 비금융데이터를 신용평가에 반영할 수 있도록 제도 기반을 마련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여전히 KCB·NICE의 전통적 신용점수가 절대 기준이다. 비금융 데이터는 '보조 수단'일 뿐, 핵심 평가 요소가 아니다. 더욱이 월세 납부 이력은 비금융 데이터 활용 확대 논의에서조차 주변부에 머물러 있다.
신용의 본질은 '상환 의지와 능력'이다. 월세를 10년간 연체 없이 납부한 사람은 명백히 그 능력을 증명했다. 무주택 1인가구의 성실한 삶이 신용으로 인정받는 것은 진정한 금융 포용 사회에 한 걸음 다가서는 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