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현재 글로벌 경제는 1995년 세계무역기구(WTO) 체제 출범 이후 가장 큰 구조적 변화를 맞이했다. 자유무역 질서는 미국과 중국의 패권 경쟁 속에서 관세 장벽과 수출 통제로 재편되는 추세다. 호르무즈 해협 사태 등 지정학적 리스크는 에너지 공급망을 상시 위협한다. 인공지능(AI) 확산에 따른 전력 수요 급증과 한일 양국이 공통으로 직면한 저출산·고령화는 기업의 생존을 위협하는 당면 과제다.
6월 9일 일본 도쿄에서 열린 닛케이포럼 '한일특별세션'에서 최태원 SK그룹 회장(최종현학술원 이사장)이 던진 메시지의 본질은 명확하다. 각자도생 대신 양국의 경제 연대를 통해 글로벌 '룰 메이커(Rule Maker)'로 도약하자는 제안이다.
최 회장이 제시한 '한일 상설 빅 텐트'와 '7조 달러 통합 경제권' 구상의 핵심 비즈니스 인사이트는 시장의 결합과 비용 효율화, 그리고 리스크 관리라는 세 가지 관점으로 볼 수 있다.
한국 메모리와 일본 소부장의 전략적 결합
가장 주목할 대목은 한국의 메모리와 일본의 소부장으로 대변되는 전략적 무기의 결합이다.
최 회장은 성장의 동력을 회복할 핵심 카드로 반도체와 AI를 꼽으며, 이를 누구도 건드리기 힘든 전략적 무기라고 규정했다. 이는 고대역폭메모리(HBM)를 비롯한 차세대 AI 반도체 시장을 선도하는 한국과, 반도체 소재·부품·장비 및 엔지니어링 생태계에서 독보적인 경쟁력을 가진 일본의 산업적 보완 관계를 의미한다.
미·중 중심의 AI 기술 패권 경쟁 속에서 양국이 각개전투를 벌일 경우 글로벌 빅테크에 종속될 위험이 크다는 지적이 지배적이다. 양국이 연대해 AI 인프라를 공동 구축하고 이를 상품화해 역외로 수출하는 구조를 만든다면, 글로벌 공급망 내에서 판도를 주도하는 협상력을 확보할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오는 이유다.
공동 대응을 통한 고비용 구조의 혁파
이러한 협력 구상은 단순한 정치적 선언에 그치지 않고, 양국 기업과 사회가 직면한 실질적인 고비용 구조를 깨뜨리는 데 방점이 찍혀 있다.
구체적으로는 구매와 도입, 비축 전 영역에서 협력해 AI 전환에 따른 전력 및 에너지 비용을 최소화하는 방안이 거론된다. AI 팩토리 공동 추진으로 규모의 경제를 확보해 제조 효율을 극대화하고, 초고령화 사회 진입에 따른 사회적 비용을 분담하기 위해 헬스케어 영역의 의료장벽을 완화하는 시도도 같은 맥락이다.
특히 '에너지는 안보'라는 최 회장의 지적은 공급망 불안이 일상화된 현 시점에 시의적절하다는 평가다.
AI 데이터센터 확충으로 전기 수요가 폭증하는 상황에서, 석유와 가스 의존도가 높고 에너지 수입 경로가 유사한 한일 양국이 공동 구매와 비축에 협력한다면 기초 인프라 비용을 대폭 낮출 수 있다. 이는 결국 양국 제조업 전반의 원가 경쟁력 강화로 직결되는 요소다.
정치적 가변성 극복할 상설 플랫폼 구축
문제는 한일 경제 협력의 역사적 걸림돌이었던 외교적 리스크를 어떻게 제어하느냐다. 외교 갈등이나 정권 교체 등 정치적 가변성이 발생할 때마다 민간 기업의 비즈니스가 동반 타격을 입는 악순환이 매번 반복됐기 때문이다.
최 회장이 제안한 빅 텐트 형태의 상설 플랫폼은 정부, 기업, 학계, 청년을 망라하는 거대한 의제 결합체이자, 대외 변수에 쉽게 흔들리지 않도록 유연성을 확보한 외교적 완충 장치로 기능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규제와 표준의 차이나 단기적인 정치적 불확실성이 발생하더라도, 민간 중심의 자발적인 경제 협력이 중단 없이 지속될 수 있도록 제도적 보호막을 구축하자는 포석으로 해석된다.
최 회장의 한일경제연대 청사진에 도쿠라 고문은 "두 나라 공통 과제인 에너지 자급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SMR 등 차세대 혁신 원전 개발에서 협력해야 한다"며 호응했다.
가토 행장도 AI 데이터센터, 반도체, 액화천연가스(LNG) 등에서의 양국 기업 협력을 예로 들며 "실무적 협력을 발전시켜 한일경제연대를 구체화하자"고 최 회장 제안에 힘을 실었다.
한편 이날 행사에서는 가와이 도시키 도쿄일렉트론 최고경영자(CEO)가 한일 연대를 통한 경제 공동번영의 중요성을 강조했고, 유혁 노무라종합연구소(NRI) 서울 대표는 한일이 함께 주도하는 ‘AI 경제권 클러스터’를 양국 협력 아젠다로 제안했다.
또 김완종 SK AX CEO와 김상배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고니시 요코 일본 경제산업연구소(RIETI) 수석연구원, 야나세 다다오 NTT 부사장은 ‘미국과 중국의 AI 패권 경쟁 속 한일 협력 필요성 및 과제’를 주제로 토론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