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 고물가·주택난·부실교육에 터진 분노…유럽 곳곳 시위 격화 프랑스·이탈리아·스페인 등 시위 물결
[이슈] 고물가·주택난·부실교육에 터진 분노…유럽 곳곳 시위 격화 프랑스·이탈리아·스페인 등 시위 물결
  • 김영호
  • 승인 2026.10.20 1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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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에서 고물가와 열악한 교육 여건에 항의하는 전국 시위가 약탈과 방화로 번졌다. 이 과정에서 143년 역사의 리모주 시청사가 불길에 무너져 내렸다. 고교생이 시작한 시위는 노동계와 '노란조끼' 세력까지 끌어들이며 몸집을 키웠다.

이탈리아·벨기에·포르투갈·스페인 등 인접국에서도 생활고를 호소하는 시위가 잇따르고 있다. 발칸반도의 알바니아에선 학생 시위가 에디 라마 총리 사퇴 요구로 번지며 6일 연속 수도 티라나에서 충돌이 벌어졌다. 내년 프랑스 대선을 비롯해 유럽 각국이 선거를 앞둔 가운데 민심 이반이 거리로 쏟아져 나오는 양상이다.

사진은 기사와 무관 ⓒgettyimagesbank

고교생이 댕긴 불씨…프랑스 전역 뒤덮은 분노

AP통신과 AFP통신 등에 따르면 지난 17일(현지시간) 프랑스 전역 110곳에서 열린 시위에 내무부 추산 약 55만명이 참여했다. 주최 측인 노동총동맹(CGT)과 학생단체는 참가 인원을 80만명으로 집계했다.

대부분은 평화 행진이었지만, 일부 복면 집단이 관공서와 상점을 공격하면서 곳곳이 폭력 사태로 얼룩졌다. 프랑스 중부 리모주에선 복면을 쓴 무리가 시청 앞 경찰 차량에 불을 지른 뒤 유리창을 깨고 청사 안으로 들어가 불을 놓았다. 현지 도지사에 따르면 서쪽 동을 뺀 나머지 지붕이 아래층으로 주저앉았고 외벽의 3분의 2가량이 사라졌다. 1883년 완공돼 역사기념물로 지정된 이 청사의 시계탑도 무너졌다. 불길은 이튿날 새벽에야 잡혔다.

파리 레퓌블리크 광장에선 경찰이 최루탄과 물대포로 시위대를 해산했고, 차량과 신문 가판대가 불에 탔다. 리옹에선 관광안내소에 불이 났다. 마르세유에선 시위대가 시청 로비에 잠시 진입했다. 보르도·릴·칼레 등에서도 관공서 침입 시도가 잇따랐다.

로랑 누녜스 내무장관은 18일 체포 인원이 1800명으로 늘었고 경찰·헌병·소방관 500명 이상이 다쳤다고 밝혔다. 정부는 폭력의 배후로 급진 극좌 세력을 지목했다. 프랑스24에 따르면 피해 업소는 약 1500곳, 손실액은 수억유로로 추산된다.

이번 사태는 고등학교에서 시작됐다. 지난 9월 하순 파리 근교 크레테유의 한 고교 학생들이 교사 결원과 30명이 넘는 과밀 학급, 낡은 교실, 대입 지원 플랫폼 '파르쿠르쉽(Parcoursup)'에 대한 불만을 제기하며 시위에 나섰다. 이 시위는 SNS를 타고 전국으로 번졌다. 이달 1일 하루에만 1000곳이 넘는 고교가 봉쇄나 수업 차질을 겪었다. 프랑스 법무부에 따르면 6일까지 누적 체포 인원은 5060명이고, 이 중 87%가 미성년자였다.

진압 과정에서는 경찰 장비에 맞아 한 손을 잃거나 한쪽 눈 시력을 잃은 10대가 나오면서 과잉 진압 논란도 커졌다. 내무부는 결국 고교생 시위 현장에서 일부 섬광수류탄 사용을 중단했다. 르피가로 의뢰 여론조사에서는 응답자의 62%가 학생 운동이 정당하다고 답했다. 다만 극좌 정당 '굴복하지 않는 프랑스(LFI)'가 이 운동을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있다는 응답도 78%에 달했다.

17일 시위에는 2018년 유류세 인상 반대로 시작된 노란조끼 운동 참가자들과 CGT가 합류했다. CGT는 임금·연금 인상과 물가 인하, 공공서비스 보호를 요구했다. 배경에는 치솟은 연료비가 있다. 올해 2월 말 미국과 이스라엘의 이란 공습으로 시작된 중동 전쟁 이후 호르무즈 해협 물류가 막히면서 유가가 급등했다. AFP 집계에 따르면 프랑스 경유 평균 가격은 9월20일 리터당 2.41유로로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사진은 기사와 무관 ⓒgettyimagesbank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은 18일 저녁 대국민 담화에서 국민이 분노와 수치심을 느끼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약탈한 이들에게 피해를 배상하게 하고 공화국을 무너뜨리려 한 이들에게 책임을 묻겠다고 밝혔다.

도지사와 시장이 협의해 필요하면 집회를 금지할 수 있도록 하고, 정보·치안 대응에 허점이 없었는지 점검하겠다는 방침도 내놨다. 이번 주 학생·교사·노조·기업인·의원이 참여하는 협의를 열어 구체적 해법을 마련하겠다고 했지만 세부 내용은 제시하지 않았다. 세바스티앵 르코르뉘 총리는 19일 오전 관계부처 위기 회의를 소집했다.

마크롱 대통령의 임기는 약 6개월 남아 있다. LFI의 장뤼크 멜랑숑 대선 후보는 학생 시위를 지지하며 17일 파리 행진에 직접 참여했다. 이번 시위는 내년 대선 레이스의 핵심 변수로 떠올랐다.

국경 넘은 시위 물결…이탈리아 학생도 거리로

이탈리아에선 16일 '노 멜로니 데이(No Meloni Day)'라는 이름의 전국 학생 행진이 열렸다. 프랑스와 스페인 시위에 자극받은 학생들은 로마·밀라노·토리노·제노바·피렌체 등지에서 교육예산 확충과 노후 학교 건물 개선을 요구했다.

정부 학교법령 철회와 주거 예산 130억유로 투입도 요구 사항에 담겼다. 학급당 외국인 학생 수를 제한하려는 방침과 국방비 증액에도 반대 목소리를 냈다. 이탈리아 경제지 일솔레24오레는 전국 40곳 이상 광장에서 수만명이 행진했다고 전했다.

토리노에선 학생들이 경찰에 돌을 던지며 충돌했고, 이달 30일 대규모 총파업을 예고했다. 마테오 살비니 부총리는 경찰에 돌을 던지는 이들은 학생이 아니라 범죄자라고 비판했다.

이튿날인 17일 밀라노 시위는 폭력 사태로 번졌다. 전쟁 반대와 생활비 상승에 항의하며 시작된 행진 도중 복면 시위대가 두오모 광장 일대 상점을 약탈하고 바리케이드에 불을 붙였다. 현지 통신사 LaPresse에 따르면 경찰관 최소 2명이 다쳤고, 미성년자를 포함해 약 50명이 구금됐다. 조르자 멜로니 총리는 SNS를 통해 시위할 권리는 존중하지만 도시를 불바다로 만드는 폭력은 용납할 수 없다고 밝혔다.

에너지 가격발 물가 급등 속에 학생과 교사, 화물차 기사, 농민까지 거리로 나섰다. 현지 언론은 내년 총선을 앞둔 멜로니 정부가 '불만의 가을'을 맞았다고 평가했다.

포르투갈·스페인·벨기에까지…생활고에 들끓는 유럽

17일에는 벨기에와 포르투갈에서도 대규모 시위가 열렸다. 각국 시위가 서로 조율된 것은 아니지만 생활비 상승이라는 같은 이유로 수십만명이 거리로 나왔다.

포르투갈 리스본에선 포르투갈노동자총연맹(CGTP) 주도로 수만명이 임금·연금 인상과 주거비 부담 완화를 요구하며 행진했다. 시위대는 도심 호시우 광장에 텐트를 치고 무기한 농성에 들어갔다. 포르투갈 집값은 2017년 이후 두 배 이상 뛰었고, 신규 임대료도 비슷한 폭으로 올랐다. 카를루스 아브레우 아모링 의회담당장관은 거리의 요구에 밀려 정책을 바꾸지 않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스페인에선 주거난이 정국을 흔들고 있다. 지난달 마드리드에서 87세 여성이 강제 퇴거되는 장면이 TV로 방영되며 공분이 커졌다. 이달 3일 마드리드 주거 시위에는 정부 추산 7만명 이상이 모였고, 푸에르타 델 솔 광장엔 1000동이 넘는 텐트가 들어섰다. 페드로 산체스 총리는 취약 세입자 퇴거를 2030년까지 유예하고 관광용 임대주택 과세를 강화하며 투자회사의 주택 매입을 제한하는 법령을 추진했다.

하지만 국민당(PP)·복스(Vox)·준츠(Junts)의 반대로 의회에서 부결됐다. 산체스 총리는 5일 당초 2027년 예정이던 총선을 11월29일로 앞당긴다고 발표했다. 스페인 양대 노조는 주거비를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의 임금을 요구하며 24시간 전국 총파업을 예고했다.

벨기에에선 프랑스 고교생 시위가 국경을 넘어왔다. 이달 1일 리에주 고교생들이 학교 앞 봉쇄에 나섰고, 이후 샤를루아·몽스·브뤼셀 등으로 퍼졌다. 7일엔 리에주 시내 폭동으로 리에주-기유맹 기차역이 폐쇄되기도 했다. 대학 등록금에 반발한 대학생 시위가 몇 주째 이어진 브뤼셀에선 17일 경찰이 최루탄과 물대포를 동원했다.

전문가들은 이번 시위가 하나의 운동이라기보다 교육 예산 부족, 생활비 상승, 졸업 후 불투명한 진로라는 공통 불만을 공유하는 동시다발 시위로 보고 있다. 또 향후 12개월 안에 스페인·프랑스·이탈리아·폴란드 등의 선거가 몰려 있어 시위가 정치 논쟁의 중심에 설 것으로 내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