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건설의 최근 행보는 단순한 사업 포트폴리오 다변화가 아니다. 건설업의 본질을 재정의하며 '에너지 솔루션 프로바이더(Energy Solution Provider)'로 체질을 완전히 바꾸는 근본적인 혁신을 진행하고 있다.
그 출발점은 2025년 3월 28일이었다. 이한우 현대건설 대표는 서울 여의도 페어몬트 호텔에서 상장 건설사 최초로 'CEO 인베스터 데이'를 열고 중장기 성장 전략 'H-Road'를 공개했다. 핵심 메시지는 분명했다. 단순 시공업체를 넘어 에너지 전환을 선도하는 '에너지 트랜지션 리더'로 도약하겠다는 선언이었다.
창사 최초 25조 돌파, 숫자 보여주는 성과
현대건설은 2025년 별도 기준 수주 25조5151억원을 기록했다. 전년 18조3111억원 대비 39% 늘어난 수치로, 단일 국내 건설사가 연간 수주 25조원을 넘긴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연결 기준으로는 매출 31조629억원, 영업이익 6530억원을 달성하며 목표치를 각각 2.2%, 7.4% 초과했다.
수주잔고는 95조896억원으로 약 3.5년치 일감을 확보했다. 재무구조도 안정됐다. 현금 및 현금성 자산은 5조1768억원, 유동비율은 전년 대비 4%포인트 오른 147.9%, 부채비율은 4.5%포인트 낮아진 174.8%를 기록했다.
인베스터 데이 당시 이 대표가 '2030년 목표'로 내걸었던 별도 기준 수주 25조원을, 현대건설은 불과 그해에 달성했다.
에너지 분야 성과가 실적 확대를 이끌었다는 분석이다. 대형 원전과 SMR, 태양광·해상풍력, 송전망, 데이터센터까지 에너지 생산·이동·소비 전 영역에서 수주를 넓히며 비경쟁·고부가가치 사업 중심으로 사업 구조를 재편한 결과였다.
건설업계 한 관계자는 "주택 시장은 금리나 정책 등 외부 요인에 영향을 너무 많이 받는다. 주택만으로는 성장에 한계가 있기 때문에 해외 사업이나 원전, 에너지 등으로 포트폴리오를 확대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전했다.
에너지 솔루션 프로바이더로의 전환: 원전이 핵심 엔진
현대건설이 에너지 솔루션 프로바이더로 도약하는 데 원자력은 핵심 엔진이다. 1978년 고리 1호기를 시작으로 신고리·신한울, UAE 바라카 원전 1~4호기까지 반세기 넘게 축적한 원전 시공 이력이 경쟁 기반이다. 특히 바라카 원전은 납기와 예산을 모두 지킨 사례로 글로벌 시장에서의 신뢰를 공고히 했다. 현대건설이 국내 가동 원전의 약 63%를 시공한 이력도 해외 수주 경쟁에서 핵심 레퍼런스로 작동한다.
이 자산을 기반으로 현대건설은 2025년 미국 에너지 디벨로퍼 페르미 아메리카와 텍사스주 아마릴로 외곽에 조성되는 세계 최대 민간 전력 복합단지 내 AP1000 대형 원전 4기 건설 기본설계(FEED) 계약을 체결했다. 국내 건설사 최초의 미국 대형 원전 수주였다. 해당 단지는 총 11GW 규모의 독립형 전력 공급 인프라와 초대형 하이퍼스케일 AI 데이터센터를 연계하는 구상으로, 현대건설은 기본설계 완료 후 2026년 상반기 EPC 본계약 체결을 목표로 협의를 이어가고 있다.
핀란드 신규 원전 건설 사전업무 계약도 이 해에 확보했다. 불가리아 코즐로두이 7·8호기는 웨스팅하우스와의 협력을 바탕으로 설계 계약을 이미 체결했으며, 토목 공사가 분리 발주될 경우 2026년에만 약 2조5000억원 규모 수주가 가능하다는 증권가 분석이 나온다.
SMR 분야에서는 홀텍(Holtec)과 함께 미국 미시간주 팰리세이즈 부지에 SMR-300 1호기 착공을 앞두고 있다. 인베스터 데이에서 이한우 대표가 직접 밝힌 에너지 사업 매출 목표는 현재 2000억원 수준에서 2030년 5조1000억원으로의 확대다. 25배 성장이라는 수치다.
밸류체인을 넓힌다: 송전에서 데이터센터까지
에너지 솔루션 프로바이더의 실체는 원전에만 있지 않다. 현대건설의 에너지 전략은 발전에서 소비까지 이어지는 밸류체인 전체를 겨냥한다.
송전 분야에서는 사우디아라비아 380kV 송전선로 사업을 수주했고, 호주 국가 전력망 재건 사업 업무협약(MOU)을 체결했다. 재생에너지에서는 미국 텍사스 'LUCY 태양광 프로젝트'와 신안 우이 해상풍력을 수주하며 저탄소 에너지 포트폴리오를 확장했다. 에너지 저장 분야에서는 이탈리아 글로벌 건설기업 위빌드와 양수발전 사업 협력 협약을 체결했다. 양수발전은 재생에너지의 간헐성을 보완하는 대용량 에너지 저장 수단으로, 국제수력협회(IHA)에 따르면 2024년 전 세계 설비 용량은 전년 대비 5% 증가한 약 189GW에 달한다.
소비 단계에서는 데이터센터가 새 축이다. AI 산업 확대로 급증하는 전력 수요와 서버 인프라 수요를 동시에 흡수하는 전략이다. 현대건설은 2025년 국내 최대 규모인 64MW급 용인 죽전 퍼시픽써니 데이터센터를 준공했으며 수도권 주요 데이터센터 수주를 이어갔다. 2026년부터는 개발부터 운영까지 사업 범위를 넓혀 일본을 시작으로 해외 진출에 나선다는 계획이다.
주총에서 확인한 다음 목표: 2026년 수주 33조
지난 3월 26일, 현대건설은 서울 계동 본사에서 제76기 정기 주주총회를 열었다. 이한우 대표는 "K-건설의 새로운 기준을 정립하고, 미래 에너지 패권을 이끌어 주주 여러분의 기대를 뛰어넘는 최고의 성과를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할 것"이라고 밝혔다. 2026년 경영목표로는 수주 33조4000억원, 매출 27조4000억원을 제시했다.
지배구조 측면에서도 변화가 이어졌다. 집중투표 배제 조항을 삭제하고 전자주주총회 도입 근거를 마련했으며, 안전·에너지·디지털 분야 전문성을 갖춘 사외이사를 신규 선임했다. 배당은 총액 900억원으로 보통주 800원, 우선주 850원으로 결정됐다.
건설을 넘어 에너지를 경영하다
현대건설은 5년 안에 달성하겠다고 했던 수주 목표를 1년 만에 돌파했고, 건물을 짓는 회사가 에너지를 설계하는 기업으로 바뀌고 있다. 2025년 에너지 프로젝트 매출이 본격화되며 실적을 끌어올렸다.
그 다음 목표는 이미 주총장에서 공개했다. 에너지 솔루션 프로바이더를 향한 'H-Road'의 세 축, 에너지 트랜지션 리더·글로벌 키 플레이어·코어 컴피턴시 포커스를 통해 글로벌 에너지 밸류체인의 선두에 서겠다는 현대건설의 변화는 이미 시작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