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주회사가 자회사에 자금을 대여하는 행위는 흔한 경영 활동이다. 그러나 그 자회사의 외형이 줄고 있는 상태에서 매출액의 두 배에 달하는 자금이 반복적으로 흘러가고, 그 자금이 다시 총수 자녀 소유의 회사로 이어지는 구조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최근 HL홀딩스가 비상장 자회사 HL위코에 대한 500억원의 금전 대여 기한을 연장하면서, 정몽원 HL그룹 회장의 두 딸인 정지수·정지연 씨가 지분을 보유한 운용사 ‘로터스프라이빗에쿼티(로터스PE)’의 자금 조달 패턴을 향한 시장의 의구심이 다시 짙어지고 있다.
외형 줄어든 자회사, 본업 매출 뛰어넘는 대여금 연장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에 따르면 HL홀딩스는 지난 11일 이사회를 열고 비상장 자회사 HL위코에 500억원을 대여하기로 결정했다. 이번 거래는 2022년 7월 집행한 대여금의 만기가 도래함에 따라 기한을 1년 더 연장(이율 연 4.6%)하는 건이다. 공시상 대여 목적은 ‘자회사의 전략적 가치투자를 위한 자금 대여’다.
주목할 부분은 자금을 수령하는 HL위코의 재무 현황이다. HL위코의 2025년 말 기준 자산총계는 1273억8600만원, 자본총계는 598억3900만원이다. 반면 당해 연도 매출액은 250억1200만원에 불과하다. 2023년 331억3600만원, 2024년 285억5700만원에 이어 외형이 지속적으로 축소되는 추세다.
물론 HL위코는 2024년 345억5900만 원의 대규모 당기순손실을 낸 이후, 2025년 41억5400만 원의 순이익을 기록하며 흑자 전환에는 성공했다. 그러나 본업의 매출 규모가 250억원대에 머무는 기업이 자본금에 육박하는 500억원의 차입금을 유지하는 배경을 두고, 일각에서는 자금의 실제 용처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는 상황이다.
‘지분율 75%’ 무늬만 사모펀드…시장서 제기되는 ‘터널링’ 의혹
HL위코를 둘러싼 논란은 이 회사가 단순한 제조업 자회사를 넘어 총수 일가 개인 회사로 향하는 ‘투자 경유지’ 역할을 하는지에 대한 의혹에서 비롯됐다.
HL홀딩스는 2021년부터 2023년까지 HL위코·HL D&I 등을 통해 약 2170억원의 자금을 특정 사모펀드(PEF)들에 출자했다. 이는 지주회사인 HL홀딩스 연간 영업이익(2023년 기준 922억원)의 2.4배를 웃도는 규모다.
문제는 이 펀드들의 공동 운용사(GP)가 바로 정몽원 HL그룹 회장의 두 딸인 정지수·정지연 씨가 지분 100%를 보유한 로터스PE라는 점이다.
HL위코의 2025년 감사보고서에 따르면, 이 회사는 로터스PE가 공동 운용하는 ‘넥스트레벨 제1호(NLPEF)’와 ‘클로버 사모투자(WCPEF)’의 지분을 각각 75.64%, 75.86% 보유하고 있다. 또 다른 운용 펀드인 ‘엘케이디1호’의 지분율도 47.48%에 달한다.
사모펀드가 통상 다수의 투자자로부터 자금을 모아 위험을 분산하는 것과 달리, 특정 비상장 계열사의 자금 비중이 75%를 넘겼다는 현황을 두고 업계에서는 사실상 총수 자녀 소유의 운용사에 보수 수익을 몰아주기 위한 계정 아니냐는 눈초리도 있다.
로터스PE가 주도한 투자처(WCP 등)의 주가 하락으로 투자 손실이 발생해도 사모펀드 구조상 운용사는 투자 성패와 관계없이 매년 일정 비율의 관리보수(수수료)를 챙긴다.
이와 관련해 HL그룹은 다수의 언론에 일관되게 로터스PE 출자가 법령상 허용된 출자 방식이며 추가 출자 계획이 없고 승계와 무관하다는 입장을 전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정지수·정지연 씨는 올해 5월 4차례 장내매수를 통해 HL홀딩스 지분을 2.22%까지 늘렸다.
공정위 조사국 격상 움직임 속 재계 긴장
재계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사정당국으로 쏠린다. 공정거래위원회는 지난 2025년 12월 HL홀딩스와 HL위코, 로터스PE를 대상으로 현장조사를 진행한 바 있다. HL그룹의 내부 자금이 비상장 자회사를 거쳐 총수 자녀 소유 사모펀드로 흘러간 구조에 부당지원 혐의가 있는지 확인하기 위한 행보로 알려졌다.
다만 현장조사가 진행된 지 약 5개월이 지난 현재까지 공정위의 최종 조사 결과나 법 위반 여부에 대한 판단은 나오지 않은 상태다. 대기업의 우회 출자 조사는 복잡한 자금 거래 증빙과 내부 의사결정 과정을 조목조목 따져야 하므로 일반적으로 상당한 시일이 소요된다. 현재 당국은 수집한 자료를 바탕으로 정밀 분석을 지속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결과는 미정이지만, 공정위의 전반적인 조직 개편 움직임은 재계에 상당한 압박을 가하고 있다. 공정위는 현재 소규모인 ‘중점조사팀’을 과거 대기업 내부거래 조사를 진두지휘했던 30~40명 규모의 대형 조직인 ‘조사국’으로 격상하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기업의 변칙적인 내부거래와 승계 구조에 대한 기획조사 기능을 대폭 강화하겠다는 취지다.
한편 공정위의 감시 수위 제고 흐름 속에서 향후 발표될 HL그룹의 우회 출자 조사 결과에 눈길이 쏠리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