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봇 산업의 경쟁 축이 움직임의 정밀도에서 판단과 학습으로 옮겨가고 있다. 과거에는 사람이 작업 순서와 동작을 정해주면 로봇이 이를 반복하는 방식이 중심이었다. 이제는 AI가 사람의 지시를 이해하고 작업을 나눈 뒤 주변 상황에 맞춰 행동을 선택하는 기술이 등장하고 있다.
피지컬 AI(Physical AI)는 이러한 변화를 보여주는 핵심 개념이다. AI가 화면 속 정보를 처리하는 데 그치지 않고 실제 공간의 물체와 환경을 인식하고 로봇의 움직임으로 연결한다. 여기에 AI 에이전트가 결합하면서 로봇은 정해진 명령을 수행하는 장비에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작업을 계획하는 시스템으로 발전하고 있다.
‘무엇을 할지’ 판단하는 로봇
구글 딥마인드(Google DeepMind)는 로봇의 움직임과 추론 능력을 결합하는 기술을 개발하고 있다. 제미나이 로보틱스 2(Gemini Robotics 2)는 시각과 언어 정보를 로봇의 행동으로 연결하는 VLA(Vision-Language-Action) 모델이다. 제미나이 로보틱스 ER 2(Gemini Robotics ER 2)는 물리적 환경을 이해하고 복잡한 작업을 계획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ER 2는 로봇과 사람의 상호작용을 이해하고 여러 단계로 구성된 작업을 계획하는 한편, 작업 진행 상황을 확인하면서 필요한 경우 계획을 수정하는 기능을 갖췄다. 서로 다른 로봇이 하나의 목표를 수행하도록 협력하는 멀티 로봇 작업도 가능하다.
이는 기존 자동화와 접근 방식이 다르다. 로봇에 모든 동작을 미리 입력하는 대신 사람이 목표를 제시하면 AI가 주변 환경과 로봇의 능력을 고려해 작업 순서를 구성하는 영역이 확대되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에서도 로봇의 ‘두뇌’를 둘러싼 경쟁이 이어지고 있다. 중국 로봇 스타트업 스피릿 AI(Spirit AI)는 자연어 지시를 바탕으로 여러 물리적 작업을 수행하는 로봇 기술을 개발하고 있다. 스피릿 AI의 휴머노이드 로봇 모즈1(Moz1)은 중국 배터리 기업 CATL과 전자상거래 기업 JD닷컴의 생산라인에 적용되고 있다고 회사 측이 밝혔다.
로봇이 사람의 말을 이해하고 행동하는 수준으로 발전하면서 중요한 기술 과제도 달라지고 있다. 어떤 동작을 반복하게 할 것인지보다 사람의 목표를 어떻게 이해하고 실제 행동으로 전환할 것인지가 중요해진 것이다.
로봇 한 대가 아니라 ‘로봇 팀’을 움직인다
피지컬 AI의 변화는 개별 로봇의 지능을 높이는 데만 머물지 않는다. 여러 종류의 로봇과 장비를 하나의 작업 체계로 연결하는 방향으로도 확장되고 있다.
공장과 물류센터에는 로봇팔, 이동로봇, 검사장비 등 서로 다른 기능을 가진 장비가 함께 사용된다. 모든 작업을 하나의 로봇이 맡는 대신 각 장비의 능력을 조합하는 방식이다.
여기서 중요한 기술이 오케스트레이션이다. AI가 작업 목표를 이해하고 이를 여러 단계로 나눈 뒤 각 로봇의 기능과 현재 상태에 맞춰 역할을 배분하는 구조다.
구글 딥마인드가 공개한 멀티 로봇 협업도 이런 방향을 보여준다. 로봇마다 다른 능력을 활용해 하나의 작업을 수행하도록 연결하는 방식이다.
미국 스킬드 AI(Skild AI)는 로봇에 적용할 수 있는 범용 AI 모델 개발에 집중하고 있다. 스킬드 AI는 폭스콘(Foxconn)의 미국 휴스턴 생산시설에 로봇 AI 모델을 적용하기 시작했으며, ABB 로보틱스(ABB Robotics), 테라다인(Teradyne)의 유니버설 로봇(Universal Robots) 등과 협력하고 있다.
이런 사례는 피지컬 AI의 경쟁이 특정 로봇의 성능을 높이는 데서 다양한 로봇과 장비를 하나의 지능으로 연결하는 방향으로 넓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로봇의 능력을 결정하는 것은 ‘경험 데이터’
AI가 현실에서 판단하려면 학습할 데이터가 필요하다. 로봇의 경우 일반적인 이미지나 텍스트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로봇은 물체의 위치와 형태뿐 아니라 움직임, 접촉, 힘, 균형, 관절의 상태 등 물리적 정보를 함께 다뤄야 한다. 사람이 실제 작업을 수행하는 모습을 관찰하거나 로봇을 직접 조작하면서 얻는 행동 데이터가 중요한 이유다.
휴머노이드 로봇 기업들이 데이터 확보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피겨 AI(Figure AI)는 2026년 8월 공개한 인덱스(Index)를 통해 108개국에서 수집한 1600만개 이상의 인간 행동 영상을 확보했다고 밝혔다. 또 향후 12개월 동안 데이터와 컴퓨팅 인프라에 10억달러 이상을 투자할 계획이라고 설명했다.
로봇이 특정 공정만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환경에 적응하려면 사람이 실제 세계에서 어떻게 움직이고 물체를 다루는지에 대한 데이터가 필요하다. 이에 따라 인간 행동 데이터와 실제 로봇의 작업 데이터가 새로운 학습 자원으로 떠오르고 있다.
실제 로봇으로 하기 어려운 학습은 가상공간에서
문제는 현실에서 로봇을 반복적으로 움직이며 데이터를 모으는 데 상당한 비용과 시간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물체를 떨어뜨리거나 충돌하는 상황까지 실제 환경에서 반복하기도 어렵다.
그래서 피지컬 AI에서는 시뮬레이션과 디지털 트윈을 활용해 가상의 환경에서 로봇을 학습시키고 검증하는 방식이 중요해지고 있다.
엔비디아(NVIDIA)는 아이작(Isaac) 로봇 개발 플랫폼과 코스모스(Cosmos) 월드 파운데이션 모델 등을 중심으로 로봇 학습과 시뮬레이션 생태계를 확대하고 있다. 가상환경에서 물리적 조건을 바꿔가며 로봇의 행동을 반복적으로 시험하고, 여기서 확보한 데이터를 실제 로봇 개발에 활용하는 방식이다.
스킬드 AI도 영상과 시뮬레이션 데이터를 활용해 로봇이 새로운 작업을 학습하도록 하는 접근을 추진하고 있다. 엔비디아가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스킬드 AI의 S1은 영상에서 작업 방법을 학습하는 로봇 파운데이션 모델이다.
결국 로봇 데이터는 한 가지 경로에서만 만들어지지 않는다. 실제 로봇의 행동 데이터, 인간의 움직임 데이터, 가상환경에서 만들어진 시뮬레이션 데이터가 서로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는 구조로 발전하고 있다.
자동차 공장이 피지컬 AI의 현장이 된다
피지컬 AI는 연구실을 넘어 실제 생산현장으로 들어가고 있다.
BMW(비엠더블유)그룹은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주 스파르탄버그 공장에서 피겨 AI의 휴머노이드 로봇을 활용하고 있다. 피겨 03(Figure 03)을 생산 과정의 물류 작업에 투입해 실제 공정에서의 활용 가능성을 시험하고 있으며, 독일에서도 휴머노이드 로봇을 활용한 생산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다.
자동차 공장은 피지컬 AI를 시험하기에 적합한 환경이다. 반복적인 작업이 존재하면서도 작업 대상과 주변 조건이 계속 달라지기 때문이다. 로봇이 단순히 정해진 동작을 반복하는 수준을 넘어 주변 상황을 인식하고 작업에 대응할 수 있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토요타(Toyota)도 공장 자동화와 현대화를 확대하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로이터는 토요타가 2028년부터 공장 현대화에 연간 약 1조엔을 투입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다만 해당 투자 전체를 피지컬 AI나 휴머노이드 로봇 투자로 볼 수는 없다.
자율성이 커질수록 ‘멈추는 능력’도 중요하다
피지컬 AI가 현실에서 더 많은 판단을 맡게 되면 안전 문제도 함께 커진다.
디지털 공간에서 AI가 잘못된 정보를 생성하면 결과를 수정할 수 있지만, 현실의 로봇이 잘못된 판단을 실행하면 설비나 제품을 손상시키거나 사람의 안전에 영향을 줄 수 있다.
따라서 로봇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뿐 아니라 어떤 행동을 해서는 안 되는지, 언제 사람에게 판단을 넘겨야 하는지, 위험한 상황에서 어떻게 작업을 중단할 것인지를 함께 설계해야 한다.
구글 딥마인드는 로봇 에이전트의 안전성을 평가하기 위한 ASIMOV-Agentic(아시모프-에이전틱) 벤치마크를 공개했다. 안전 기준을 위반하는 작업을 거부할 수 있는지, 수행할 수 없는 작업을 인식하는지, 불확실한 상황에서 사람에게 도움을 요청하는지 등을 평가한다.
AI가 작업을 계획했다고 해서 그 결과를 곧바로 로봇의 행동으로 연결하는 것도 위험할 수 있다. 최근에는 AI가 계획을 세우는 단계와 로봇이 실제 행동을 수행하는 단계를 분리하고, 실행 전 로봇의 능력과 시스템 상태를 검증하는 구조도 제안되고 있다.
피지컬 AI에서 자율성이란 단순히 더 많은 결정을 스스로 내리는 것이 아니라 필요할 때 행동을 멈추고 사람에게 판단을 넘길 수 있는 능력까지 포함하는 개념으로 확장되고 있다.
‘똑똑한 로봇’에서 ‘일을 맡길 수 있는 시스템’으로
지금까지의 로봇 경쟁이 더 빠르고 정확하게 움직이는 기계를 만드는 데 집중했다면 피지컬 AI 시대에는 로봇을 둘러싼 전체 시스템의 경쟁이 중요해지고 있다.
구글 딥마인드는 로봇의 추론과 협업을, 스킬드 AI와 엔비디아는 범용 로봇 모델과 시뮬레이션을, 피겨 AI는 인간 행동 데이터 확보를, BMW는 실제 제조현장 적용을 확대하고 있다. 스피릿 AI 역시 자연어 기반 로봇 제어와 생산현장 적용에 나서고 있다.
국내에서는 NC AI(엔씨에이아이)가 현대로템과 컨소시엄을 구성해 국방과학연구소(ADD)가 발주한 ‘피지컬 AI 기반 통합 시뮬레이터 및 모듈형 로봇 시스템’ 국책 연구개발 과제의 최종 사업자로 선정됐다. NC AI는 이 과제에서 로봇 파운데이션 모델 구현의 핵심 기술인 ‘월드모델’ 개발을 맡는다. 현실 공간의 물리 법칙과 환경 변화를 가상환경에서 학습시켜, 무인 로봇이 실제 전장이나 야지 환경에 투입됐을 때 시뮬레이션과 현실 간 격차를 줄이는 구조다.
각 기업의 접근 방식은 다르지만 방향은 맞닿아 있다. 로봇을 정해진 동작을 반복하는 기계가 아니라 환경을 인식하고, 경험을 학습하고, 목표에 맞춰 행동을 선택하는 시스템으로 바꾸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데이터는 로봇의 경험이 되고, AI 에이전트는 경험을 바탕으로 작업을 계획한다. 오케스트레이션은 여러 로봇과 장비의 역할을 연결하고, 안전 시스템은 AI의 판단이 위험한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도록 통제한다.
피지컬 AI의 다음 경쟁은 로봇이 사람처럼 움직이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사람이 목표를 제시했을 때 로봇이 이를 이해하고, 필요한 작업을 나누고, 적절한 장비를 선택하고, 부족한 경험을 데이터로 보완하면서도 위험한 상황에서는 스스로 멈출 수 있는지가 중요해지고 있다.
피지컬 AI가 바꾸는 것은 로봇의 움직임만이 아니다. 사람이 로봇에게 일을 맡기는 방식 자체가 달라지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