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계청에 따르면 한국의 65세 이상 고령 인구 비중은 2024년 기준 19.2%로, 2025년 초고령사회(20%) 진입을 눈앞에 두고 있다. 노후 소득 기반이 취약한 상황에서 퇴직연금을 단순히 '묻어두는 돈'이 아닌 '굴리는 돈'으로 바라보는 시각이 확산되는 추세다.
문제는 인식과 현실의 괴리다. 2024년 말 기준 국내 퇴직연금 적립금 규모는 430조원을 넘어섰지만, 이 가운데 실제 투자 수익을 추구하는 실적배당형 상품 비중은 17.5%에 그친다. 나머지 80% 이상은 원리금보장형 상품에 머물러 있다. 연간 물가 상승률을 감안하면 원금 보전만으로는 실질 구매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는 구조다.
이런 흐름 속에서 생애주기형 자산배분 펀드인 TDF(Target Date Fund) 시장이 빠르게 몸집을 키우고 있다. 2011년 국내 도입 당시 수백억원 수준에 불과했던 TDF 순자산 총액은 2025년 3월 20조원을 돌파했다. 지난 한 해에만 4조6032억원이 순유입되며 연간 기준 역대 최대 규모를 기록했다. 이는 NH투자증권 100세시대연구소가 2월 25일 발간한 'TDF로 시작하는 은퇴 자산관리' 보고서에 담긴 내용이다.
1990년생은 'TDF2050'? 숫자에 숨겨진 자동 자산배분의 비밀
TDF는 투자자가 은퇴 예상 연도를 지정하면 그 시점을 향해 자산 배분이 자동 조정되는 구조다. 은퇴까지 시간이 많이 남았을 때는 주식 등 위험자산 비중을 높게 유지하다가, 목표 시점이 가까워질수록 채권·현금성 자산 비중을 늘려 변동성을 낮추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이 자산 배분 경로를 업계에서는 '글라이드 패스(Glide Path)'라고 부른다.
투자 기간이 길수록 단기 변동성을 감내할 여력이 크다는 이론적 배경이 이 구조의 근거다. 아직 수십 년의 근로소득이 남아 있는 사회초년생처럼 투자 여력이 긴 경우, 주식 비중이 높아도 시간이 회복을 도와준다는 논리다.
펀드 이름에 붙는 숫자가 곧 목표 은퇴 연도다. 1990년생이 60세 은퇴를 목표로 한다면 'TDF2050'을 선택하는 식이다. 숫자가 클수록 주식 비중이 높고, 작을수록 안전자산 비중이 높다. 이를 업계에서는 이 숫자를 '빈티지'라고 부른다.
예를 들어 TDF2050은 TDF2035보다 은퇴 시점이 15년 더 남아 있다는 뜻이므로, 그만큼 위험자산인 주식 비중을 높게 유지한다. 반대로 TDF2030처럼 숫자가 작으면 은퇴가 가까운 것으로 보고 채권 등 안전자산 비중을 높인다.
"하락장 무서워 마라"…2022년 쇼크 이겨낸 장기 투자의 복리 효과
TDF가 시장 변동을 완전히 차단하는 구조는 아니다. 2022년 미국 연방준비제도의 급격한 기준금리 인상으로 주식과 채권이 동시에 하락하는 이례적 상황이 전개됐고, TDF 평균 수익률은 전년도 약 11.2%에서 -15.4%로 급락했다.
주식과 채권이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는 예외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하지만 이후 시장이 안정을 되찾으면서 TDF는 자산 배분 원칙에 따라 반등했고, 2026년 1월 12일 기준 최근 3년 누적 평균 수익률은 42.8%를 기록했다.
장기 투자의 설득력을 보여주는 수치도 있다. 1980년부터 2024년까지 45년간 미국 S&P500 지수에 1만 달러를 투자했을 때, 전 기간을 그대로 보유한 경우 연평균 10.9%의 수익률로 약 165만 달러로 불어났다. 반면 같은 기간 중 가장 수익률이 높았던 20일에 투자를 하지 않았다면 최종 자산은 약 4만2000달러로 줄어든다. 이에 연평균 수익률은 2.8%에 그쳤을 것이다.
단 20일의 공백이 최종 자산 규모를 40분의 1 수준으로 낮춘 셈이다. 시장 진입 타이밍을 맞추려는 시도가 장기적으로 오히려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수치다.
운용사별 점유율 전쟁에 수수료 '뚝'
국내 TDF 시장은 미래에셋자산운용이 약 30%의 점유율로 선두를 유지하고 있으며, 삼성자산운용(16%), KB자산운용(14.5%), 한국투자신탁운용(11%), 신한자산운용(9%) 순이다. 상위 5개사가 전체의 80% 이상을 차지하는 구조지만, 경쟁 심화로 소비자 부담은 낮아지는 추세다. TDF 총보수는 과거 연 0.8~1.2% 수준에서 현재 0.2~0.9% 수준까지 내려왔다.
상품 수도 꾸준히 늘고 있다. 2022년 139개였던 TDF 개수는 2026년 1월 기준 226개로 증가했다. 초장기 빈티지(2055·2060) 상품 출시, 리스크 성향별 세분화 등 상품 다양성도 확대되는 중이다.
투자자가 반드시 확인해야 할 3가지 체크포인트
TDF를 선택할 때 빈티지 숫자만 볼 게 아니라 글라이드 패스 유형도 따져야 한다. 은퇴 시점에 자산 배분 조정이 끝나는 'To-Retirement' 방식과, 은퇴 이후에도 수년간 조정이 이어지는 'Through-Retirement' 방식으로 나뉜다. 은퇴 후 20~30년의 생존 기간을 고려한다면 후자가 더 적합할 수 있다는 게 전문가의 설명이다.
환헤지 여부, 국내외 자산 비중, 액티브·패시브 운용 방식, 총보수 수준도 장기 수익률에 실질적인 영향을 미치는 요소들이다. 다만 국내 TDF는 펀드명만으로 글라이드 패스 유형을 파악하기 어렵기 때문에 투자설명서의 자산배분 전략 항목을 직접 확인할 필요가 있다.
한편 2025년 3분기 기준 퇴직연금 적립액은 459조원을 넘어서며 2024년 말 대비 32조원 이상 늘었다. 이 가운데 약 29조원이 원금비보장형 상품에서 발생해 운용 방식의 변화가 서서히 진행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