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인가구·야간 노동자 접근성 개선 기대
늦은 밤 갑자기 열이 나거나 속이 불편해도 문을 연 약국을 찾기 어려운 경우가 적지 않다. 혼자 사는 1인가구라면 대신 약을 사다 줄 사람도 없어 불편은 더 커진다.
정부가 편의점 안전상비의약품 품목 확대를 추진하면서 관련 논의가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소비자들은 심야·휴일 의약품 접근성이 좋아질 것으로 기대하는 반면, 약사단체는 오남용 우려를 들어 안전성 검증이 먼저라며 맞서고 있다.
보건복지부는 올해 하반기 전문가 위원회를 구성해 안전상비의약품 품목 확대를 논의할 계획이다. 판매 가능 점포를 넓히기 위한 약사법 개정도 검토한다.
현행 약사법상 편의점에서 판매할 수 있는 안전상비의약품은 최대 20개 품목이다. 하지만 현재 지정 품목은 13개에 그치고, 이 중 일부 품목은 생산 중단으로 실제 판매 품목이 11개까지 줄었다.
편의점 안전상비약 제도는 2012년 도입됐다. 약국이 문을 닫는 심야나 공휴일에 최소한의 의약품 구매 불편을 줄이자는 취지였다. 그러나 도입 이후 14년 동안 품목 확대는 이뤄지지 않았다.
밤·주말에 몰리는 수요
편의점업계는 안전상비약 수요가 주로 약국 영업 외 시간에 발생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올해 1~5월 기준 CU의 안전상비약 매출 중 50.5%는 오후 9시부터 다음 날 오전 5시 사이에 발생했다. 요일별로는 일요일 매출 비중이 23.2%로 가장 높았다.
세븐일레븐과 GS25 역시 저녁 이후부터 새벽 시간대 매출 비중이 절반 안팎을 차지했다. 약국이 문을 닫은 시간대에 편의점이 보완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소비자단체도 품목 확대를 요구하고 있다. 한국소비자단체협의회는 편의점 상비약 판매가 단순한 편의 문제가 아니라 국민의 생활 안전, 건강권, 소비자 선택권과 연결돼 있다며 법상 허용된 20개 품목까지 확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특히 1인가구, 맞벌이 가구, 돌봄 가구, 야간 노동자, 이동이 어려운 고령층은 약국 운영시간 외에도 기본적인 의약품 접근이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추가 후보로는 지사제, 제산제, 화상연고 등이 거론된다. 과거 안전상비의약품 지정심의위원회에서도 이들 품목은 야간·휴일 시급성과 소비자 수요 등을 이유로 검토된 바 있다. 다만 복지부는 아직 확대 대상 품목이 정해진 것은 아니라고 밝혔다. 향후 전문가 위원회에서 품목별 필요성과 안전성을 함께 검토한다는 방침이다.
약사회 “오남용 우려부터 봐야”
약사단체는 품목 확대에 신중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의약품은 일반 소비재와 달리 부작용과 상호작용 가능성이 있는 만큼, 접근성보다 안전한 사용이 우선돼야 한다는 것이다.
대한약사회는 편의점 판매가 늘어날수록 소비자들이 의약품을 ‘쉽게 사도 되는 물건’으로 인식할 수 있다고 우려한다. 복약지도 없이 구매가 이뤄지는 만큼 복용량 초과, 중복 복용, 음주 후 복용 등 오남용 가능성이 커질 수 있다는 지적이다.
판매 현장 관리도 쟁점이다. 약사회는 편의점 판매자 교육이 충분하지 않고, 실제 판매를 담당하는 종업원의 의약품 이해도에도 한계가 있다고 주장한다.
약사회는 접근성 개선이 필요하다면 공공심야약국 확대, 휴일지킴이약국 강화 등 다른 방안도 함께 논의해야 한다고 보고 있다. 편의점 판매 품목을 늘리는 방식만으로는 안전 문제를 해결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해외는 품목보다 관리 방식에 초점
해외에서는 한국보다 약국 밖 의약품 판매 범위가 넓은 경우가 많다. 다만 단순히 판매처를 넓히는 데 그치지 않고 품목 위험도, 포장 단위, 라벨 표시, 판매자 자격 등을 함께 관리한다.
미국은 드러그스토어와 대형마트 등에서 다양한 일반의약품을 판매한다. 대신 OTC 의약품에는 성분, 용도, 경고, 복용법 등을 담은 ‘Drug Facts’ 라벨을 표시하도록 한다. 소비자가 약사 설명 없이도 기본 정보를 확인할 수 있게 한 것이다.
영국은 일부 진통제를 약국 밖에서도 살 수 있지만, 일반 판매처의 포장 단위를 제한한다. 한 번에 구매할 수 있는 양을 줄여 과다복용 위험을 낮추는 방식이다.
일본은 일반의약품을 위험도에 따라 나누고, 판매 가능 인력도 구분한다. 위험도가 높은 품목은 약사의 관여가 필요하고, 상대적으로 위험도가 낮은 품목은 등록판매자가 판매할 수 있다.
이 때문에 국내에서도 품목 확대와 함께 안전장치를 정교하게 마련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소포장 판매, 경고 문구 강화, 연령 제한, 판매량 제한, POS 차단, 판매자 교육 등이 함께 논의돼야 한다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