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연금 시장이 빠르게 커지고 있다. 지난해 말 기준 퇴직연금 적립금은 500조원 규모에 이르며 노후 자산의 핵심 축으로 자리 잡았다.
자산 규모가 증가한 만큼 고민도 커지고 있다. 많은 은퇴자가 퇴직금을 한 번에 인출하거나 예금 형태로 묶어두면서 물가 상승과 세금 부담에 취약한 구조가 여전히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돈이 한 번에 들어오다 보니 투자나 창업, 부동산 매입 등에 활용하려는 유혹도 생긴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이런 선택이 노후 자산을 크게 훼손하는 사례가 적지 않다.
금융권에서는 퇴직금을 바라보는 관점을 바꿔야 한다고 강조한다. 목돈을 한 번에 사용하는 자금이 아니라 은퇴 후 수십 년 동안 생활을 지탱해 줄 '제2의 월급'으로 설계해야 한다는 것이다.
고령화가 빠르게 진행되는 한국 사회에서 퇴직금 운용 방식은 단순한 재테크를 넘어 노후 안정성을 좌우하는 핵심 변수로 떠오르고 있다. 특히 은퇴 이후에도 활동적인 삶을 추구하는 액티브 시니어 세대에게는 퇴직금 운용 전략 자체가 노후의 삶의 질을 좌우하는 핵심 변수다.
일시금보다 연금…세금에서 차이
퇴직금을 연금 형태로 받는 전략이 주목받는 첫 번째 이유는 세금이다. 퇴직금을 일시금으로 수령하면 퇴직소득세를 고스란히 부담해야 하지만, 개인형 퇴직연금(IRP) 계좌로 옮겨 연금 형태로 나눠 받으면 세금 부담이 크게 줄어든다.
현행 제도에서는 퇴직금을 연금으로 수령할 경우 퇴직소득세의 약 30%를 감면받을 수 있고, 11년째 이상부터 감면 폭은 40% 수준까지 확대된다. 20년 이상 장기 수령할 경우 50% 감면안이 최근 추진 중이다. 같은 퇴직금이라도 수령 방식에 따라 수천만 원의 세금 차이가 발생할 수 있다.
IRP로 만드는 '월급 시스템'
IRP는 퇴직금을 장기적으로 운용할 수 있는 대표적인 연금 계좌다. 이 계좌에 자금을 넣어 운용하면 투자 과정에서 발생하는 이자와 배당에 대해 즉시 과세하지 않고 연금을 받을 때까지 과세를 미룰 수 있다. 연금으로 수령할 때 적용되는 세율도 일반 금융소득보다 낮은 수준이다.
최근에는 IRP를 활용해 퇴직금을 월급처럼 사용하는 전략도 확산되고 있다. 퇴직금을 계좌에 넣은 뒤 채권형 펀드나 안정적인 상장지수펀드(ETF) 등에 투자하고 매달 일정 금액을 인출하는 방식이다. 이렇게 하면 국민연금과 개인연금에 더해 퇴직연금까지 '연금 탑'을 쌓을 수 있다.
ISA와 연결하는 2단계 노후자산 전략
IRP와 함께 ISA(개인종합자산관리계좌)를 활용하는 전략도 주목받고 있다. ISA는 일정 기간 자산을 운용한 뒤 발생한 이익에 대해 비과세 또는 분리과세 혜택을 받을 수 있는 계좌다.
특히 ISA 만기 자금을 연금 계좌로 이전하면 추가적인 세제 혜택도 받을 수 있다. 이 때문에 금융권에서는 ISA에서 자산을 키운 뒤 만기 때 IRP로 옮겨 노후 연금 라인에 편입하는 2단계 구조를 노후 자산 전략으로 제시한다.
경제활동기에는 ISA를 활용해 투자 자산을 운용하고, 만기 이후에는 IRP로 옮겨 연금 형태로 활용하는 방식이다. ISA는 자산을 키우는 계좌, IRP는 생활비를 만드는 계좌 역할을 하는 셈이다.
디폴트옵션…퇴직연금 운용 방식 변화
퇴직연금 제도도 변화하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디폴트옵션(사전지정 운용제도)이다. 가입자가 별도의 운용 지시를 하지 않으면 퇴직연금 자산이 자동으로 사전에 지정된 상품에 투자되도록 하는 제도다.
과거에는 많은 가입자가 원금 보장형 상품에만 자금을 넣어두면서 퇴직연금 수익률이 물가 상승률에도 못 미치는 문제가 있었다. 디폴트옵션은 이러한 구조를 개선하기 위해 도입된 제도로, 타깃데이트펀드(TDF)나 채권혼합형 펀드 같은 비교적 안정적인 상품이 기본 선택지로 활용된다.
정부는 개인의 낮은 수익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올 들어 퇴직연금 기금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전문 운용기관이 자금을 통합 운용해 수익률을 높이겠다는 취지다. 일부에서는 개인 투자 선택권 축소와 공적 자금 활용 논란 등을 이유로 우려가 제기되기도 한다.
노후 자산의 핵심은 '현금 흐름'
전문가들은 은퇴 이후에도 일정 수준의 투자 자산을 유지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평균 수명이 길어지면서 은퇴 이후 생활 기간이 30년 이상으로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퇴직금 관리의 핵심은 목돈을 어떻게 굴리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현금 흐름으로 바꾸느냐에 있다. 국민연금과 퇴직연금, 개인연금에 배당이나 이자 소득을 결합해 매달 일정한 생활비가 들어오는 구조를 만들면 노후 자산의 안정성이 높아진다.
정년 이후에도 활동적인 삶을 추구하는 액티브 시니어에게 퇴직금은 더 이상 한 번에 쓰는 자금이 아니다. 은퇴 이후 긴 삶을 지탱해 줄 두 번째 월급이다.
이에 노후 자산 관리에서 중요한 것은 얼마를 가지고 있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오래 버티는 구조를 만들었느냐가 중요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