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연금, 공공기관 대상 참여 검토
수탁법인 역할·감독 체계, 쟁점으로
퇴직연금 제도 개편 논의가 본격화되고 있다. 정부는 여러 사업장의 퇴직연금을 하나의 기금으로 묶어 운용하는 ‘기금형 퇴직연금’ 도입을 추진 중이다.
현행 퇴직연금은 기업이나 개인이 금융회사와 직접 계약을 맺는 형식이다. 가입자가 직접 상품을 고르고 운용 결과도 부담하는 구조다. 그러나 개별 가입자가 금융상품을 비교하고 장기 운용 전략을 세우기는 쉽지 않다. 결과적으로 상당수 자금이 안정성 위주의 상품에 머무르게 돼 퇴직연금의 노후소득 보장 기능이 약하다는 지적이 이어져 왔다.
국내 퇴직연금 적립금은 2025년 기준 501조4000억원을 넘어섰다. 그러나 전체 적립금의 75.4%인 378조1000억원이 원리금 보장형 상품에 들어가 있다. 2025년 퇴직연금 평균 수익률은 6.47%로, 같은 기간 국민연금 수익률 18.8%와 차이를 보였다.
고용노동부와 노동계, 경영계가 참여한 노사정 태스크포스는 기금형 퇴직연금 도입에 합의해다. 정부는 이달 말까지 세부 제도를 설계하고 연내 근로자퇴직급여보장법 개정을 추진할 계획이다.
국민연금 “메기 역할” vs 금융권 “시장 잠식”
국민연금공단은 기금형 퇴직연금 참여 의사를 밝히고 있다. 국민연금이 검토하는 방식은 공공기관 임직원을 대상으로 하는 ‘공공기관 개방형’ 모델이다.
국내 1인 이상 사업장은 약 186만개, 이중 공공기관은 342개로 전체의 0.2% 수준이다. 공단은 민간 금융시장과의 충돌을 줄이기 위해 우선 공공기관을 대상으로 제도를 시작하겠다는 구상이다.
국민연금은 현재 1600조원 규모의 기금을 운용하고 있다. 공단은 기존 국민연금기금과 퇴직연금기금을 분리된 계정으로 운용하고, 공공기관 개방형 기금은 비영리 방식으로 운영하겠다는 입장이다. 민간 퇴직연금보다 낮은 비용과 장기 운용 경험을 앞세워 시장 경쟁을 촉진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금융권은 국민연금 참여를 경계한다. 국민연금이 처음에는 공공기관을 대상으로 들어오더라도 향후 민간 영역을 확대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거대 기금과 전국 조직망, 낮은 수수료를 갖춘 공적 기관이 퇴직연금 시장에 들어오면 민간 금융사와의 경쟁 구도가 흔들릴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국민연금의 독립성도 쟁점이다. 국민연금은 공적 기금인 만큼 정부 정책이나 자본시장 안정 목적과 완전히 분리되기 어렵다는 지적이 나온다. 퇴직연금은 가입자 개개인의 노후자금인 만큼 운용 판단이 가입자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이뤄질 수 있는지 따져봐야 한다는 것이다.
수탁법인, 굴리는 주체인가 감시하는 주체인가
기금형 퇴직연금의 또 다른 쟁점은 수탁법인의 역할이다. 기금형은 별도의 수탁 주체가 가입자를 대표해 퇴직연금을 관리하는 방식이다. 이 수탁법인이 직접 돈을 굴리는 주체가 될지, 운용사를 고르고 감시하는 주체가 될지가 핵심이다.
문제는 수탁법인이 운용과 감시를 동시에 맡을 경우다. 운용을 직접 하는 주체가 자신의 운용 성과를 스스로 점검하는 구조가 되면 이해상충이 생길 수 있다. 기금형 도입 취지가 가입자를 대신해 금융사를 견제하는 데 있다면 감시와 운용 기능을 분리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수탁법인에 많은 기능을 맡길 경우 사업자가 줄어들 가능성도 있다. 운용, 운영, 영업, 감시 기능을 모두 갖추려면 자본금과 인력, 시스템 투자가 필요하다. 이 경우 실제 시장에 들어올 수 있는 곳이 대형 은행, 보험사, 자산운용사 등 일부 사업자로 제한될 수 있다.
수탁법인 이사회 구성과 감독 체계도 확정되지 않았다. 정부와 노사정 논의에서는 이사회에 근로자위원을 일정 비율 참여시키는 방안, 가입자가 성과가 부진한 기금에서 다른 기금으로 쉽게 이동할 수 있도록 하는 방안 등이 검토되고 있다.
정부는 기금형을 도입하더라도 기존 계약형 퇴직연금은 유지할 방침이다. 가입자가 계약형과 기금형 중 선택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기금형 퇴직연금은 낮은 수익률을 개선하기 위한 대안으로 논의되고 있다. 다만 제도가 실제 효과를 내려면 국민연금 등 공적 연기금의 참여 범위, 수탁법인의 권한, 운용과 감시의 분리, 가입자 이동권과 감독 체계가 함께 정리돼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