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성혼이냐 아니냐"에 막히기 전, 이미 25년을 운영한 나라들이 있다
한국에서 '비혼·비혈연 관계의 법적 인정'은 여전히 논쟁 중이다. 그런데 프랑스는 이미 1999년에 이 문제를 풀었다. 독일은 2001년, 호주 빅토리아주는 2008년이었다. 이 나라들이 선택한 방식은 각기 달랐지만, 공통점은 하나였다. 전통적 가족 관계 바깥의 사회적 유대를 제도권 안으로 수용했다는 것이다. 지정돌봄관계등록제를 설계하는 데 있어 이 해외 사례들이 중요한 참고점이 되는 이유다.
프랑스 PACS: 동성혼 논란을 넘어 '공동의 삶'을 인정하다
프랑스의 시민연대계약(Pacte civil de solidarité, PACS)은 1999년 도입됐다. 성별에 무관하게 두 성인이 계약을 통해 동반자관계를 형성하고, 소득세 공동납세·건강보험 수급권·사망 시 거주 승계·공동양육권 등의 권리를 보장받는 구조다. 시청 또는 공증사무소에 계약서를 제출하면 효력이 발생한다.
도입 당시 PACS는 동성 커플을 위한 제도로 오해받았다. 반발도 거셌다. 그러나 25년이 지난 현재 PACS의 90%는 이성 간 결합이다. 2022년 기준 프랑스에서 체결된 PACS는 약 20만9000건으로, 같은 해 혼인(약 24만1000건)의 87% 수준에 달한다. 젊은 세대에서는 혼인보다 PACS를 먼저 선택하는 경향이 뚜렷하다. 결혼의 사전 단계로 PACS를 거치는 커플도 많다.
PACS가 제도적으로 성공한 핵심 요인은 목적의 명확성이다. 프랑스 시민법은 결혼을 '가족을 구성하기 위해 만들어지는 두 사람의 결합'으로, PACS는 '공동의 삶을 조직하기 위해 맺는 계약'으로 각각 구분해 정의한다. 혼인을 대체하는 제도가 아니라, 다양한 삶의 방식을 포괄하는 별도의 틀로 설계된 것이다. 이 구분이 사회적 갈등을 최소화하면서 제도가 뿌리내리는 데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독일: '점진적 확장'으로 사회적 합의를 만들다
독일은 2001년 등록된 생활동반자관계법(Gesetz über die Eingetragene Lebenspartnerschaft)을 시행했다. 초기에는 동성 커플에게만 적용됐지만, 단계적으로 권리를 확장했다. 재산·상속, 자녀와의 관계, 양육권, 입양 등 법률혼과 유사한 권리가 점차 인정됐다. 2017년 동성혼이 합법화된 이후 신규 등록은 종료됐고, 기존 관계는 유지하거나 혼인으로 전환할 수 있게 됐다.
독일 사례의 핵심 교훈은 '점진적 접근'이다. 처음부터 모든 권리를 부여하지 않고, 사회적 수용 수준을 확인하면서 단계적으로 범위를 넓혔다. 반대 여론을 일시에 자극하지 않으면서 실질적 평등을 달성한 전략이다.
호주 빅토리아주: '돌봄 관계'를 독립된 유형으로 인정하다
호주 빅토리아주의 관계법(Relationships Act, 2008년)은 지정돌봄관계등록제와 가장 유사한 구조를 갖는다. 이 법은 두 가지 유형의 관계를 법적으로 인정한다. 등록 가능한 동거 관계(두 성인이 결혼하지 않고 동거하며 서로에게 개인적·재정적 지원을 제공하는 관계)와, 등록 가능한 돌봄 관계(두 성인이 서로에게 개인적·재정적 지원을 제공하는 관계로, 반드시 동거할 필요가 없음)다.
돌봄 관계를 동거 관계와 분리해 독립된 법적 유형으로 설정한 것이 핵심이다. 같이 살지 않아도 돌봄 관계를 맺고 있다면 법적 지위를 인정받을 수 있다. 의료결정권, 법적 대표권, 재산 분할 및 생활비 지원 청구권, 상속 관련 권리 등이 보장된다. 국회미래연구원 보고서가 지정돌봄관계등록제의 해외 참고 사례로 이 법을 명시한 이유다.
한국형 모델이 나아가야 할 방향
세 나라의 사례에서 공통적으로 읽히는 설계 원칙이 있다. 기존 혼인·가족 제도를 위협하지 않는다는 신호를 명확히 하면서, 그 바깥의 다양한 관계를 단계적으로 포섭했다는 점이다.
국회미래연구원 보고서는 지정돌봄관계등록제가 이 방향을 그대로 따라야 한다고 제안한다. 도입 초기에는 지정자의 생명권 보호에 집중하고, 재산권·상속권·의료결정권은 제외한다. 동성혼 논란과 얽힐 여지가 있는 생활동반자제도와 달리 지정돌봄제는 1대1 배타적 관계를 전제하지 않고 복수·단방향 지정이 가능한 구조여서, 사회적 갈등 지점 자체가 다르다.
프랑스가 PACS를 도입할 때 제기됐던 우려들, 즉 가족 해체, 동성혼 확산, 사회적 혼란은 25년이 지난 지금 현실화되지 않았다. 대신 다양한 삶의 방식을 포용하는 사회적 유대의 틀이 자리를 잡았다. 독일은 논란 속에서도 점진적 접근으로 제도를 안착시켰고, 호주 빅토리아주는 돌봄 관계를 독립된 법적 유형으로 인정함으로써 가족 밖의 돌봄을 제도권 안으로 끌어들였다. 한국형 지정돌봄제가 참고해야 할 것은 제도의 내용만이 아니라, 이 나라들이 사회적 합의를 만들어간 방식이다.

